네팔 사람들한텐 동네 뒷산 (히말라야 시리즈 1)
#1. 바라보는 산과 오르는 산은 다르다.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산을 아래서 보면 되지, 굳이 왜 올라야 하나 생각했다. 내게 끈기나 인내심이 부족한 편이 아니었는데도, 끝까지 오르는 건 흥미도 재미도 없었다. 고1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도 한라산 정상까지 오르기 귀찮아, 중간에 하산해서 나 같은 친구들과 주차장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가족과 지리산에 갔을 때도 삼십 분 적당히 산책하고 하산했다. 엄마는 기초 체력이 약해 걷는 걸 싫어하고 몸을 아끼는 분이었다. 우리 집의 대장은 엄마였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가도 걷고 뛰고 오르는 과정은 생략했다. 먹는 것에 진심이었던 엄마는 먹을 것만 바리바리 싸와 식구들 먹이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엄마의 체력은 음식을 만들고 나면 끝이었다. 소화가 안될 때까지 꺽꺽거리게 먹이고 몸은 하나도 안 쓰고 차로 이동했다. 엄마랑 있으면 금세 몸무게가 2-3킬로 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20년을 이렇게 자란 내가, 놀랍게도 스무 살에 선배들의 꼬임에 넘어가 가입한 산악 동아리에서는 에이스로 거듭났다.
신입생 시절, 거의 매일 저녁 모임이 있어 나가서 먹고 마시고 하다 보니 몸무게가 4킬로 정도 불었다. 불어난 살은 체력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내 생애 최고 몸무게와 최고 체력이 한 번에 왔다. 산악 동아리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떼 지어 산을 갔다. 모두가 잠든 아침 6-7시경, 버스를 타고 출발해 산 입구까지 가서 몸통만 한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질끈 묶었다. 구호 비슷한 걸 다 함께 외치고 나면 산행의 시작이었다.
산을 오르내릴 때는 페이스(pace)조절을 잘해야 한다. 그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 처음엔 산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싸우듯 산을 올랐다. 산은 나에게 있어 정복의 대상이었다. 빨리 오르고 쉬어야지 하는 마음만 가득이었다. 굳게 다문 입술로 한마디도 안 하며 내 몸의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했다. 한마디라도 입 밖에서 나가면 이 집중력이 흐트러질 것만 같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힘들다는 생각이 몸을 지배하게 되고, 그러면 힘든 몸을 질질 끌며 쉬고 싶은 생각만 들 것이었다. 눈빛마저 이글이글해서 산에 갈 때마다 화가 난 사람처럼 보여 동기들이 어디 화났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 시절, 산에 오르는 것 자체만을 목적 삼아 한순간도 쉬지 않고 올랐으니 당연히 잘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산악부의 에이스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그 에이스는 산에 다녀온 날 밤마다 두통과 몸살에 시달리며 타이레놀을 벗 삼아 잠이 들곤 했다.
몇 번의 산행이 지난 후 산을 오르는 여유가 생기자,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계절의 색깔이 이렇게 다채로웠나, 산에서 나는 피톤치드 가득한 향은 또 어떻고, 자연의 소리는 기분 좋은 수다소리 같네. 눈과 코와 귀가 한 번에 뻥 뚫렸다.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산에 가는 발걸음이 속도는 늦춰졌지만 가벼웠다. 무게감이 덜어지면서 왠지 몸도 마음도 맑아졌다. 여전히 고단한 산행이었으나 즐겁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왜 산을 오르는지, 산 정상에서 닦는 땀방울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3년의 산행으로 산에 대한 기초를 다지고 4학년이 되던 해, 히말라야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다란 2400km의 히말라야 산맥 중에서도 그나마 만만하다는 네팔에 있는 안나푸르나에 가기로 했다.
#2. 만날 사람은 어디에서나 결국 만나게 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려면 네팔 제2의 도시인 '포카라'에 가야 한다. 당시만 해도 포카라로 바로 가는 교통편이 없어서 수도인 카트만두를 거쳐 가야 했다. 카트만두에서 먼저, 나의 솔메이트이자 여행메이트인 산악동아리 친구를 만났다. 사실 이 만남은 '만났다' 세 글자로 가볍게 넘길만한 만남은 아니었다. 나처럼 질풍노도의 20대를 보내던 그녀. 우리는 같은 시기에 휴학을 했고 각자 원하는 코스로 여행을 하다 중간에 만나기로 했었다. 나는 중국에서 시작해 티베트, 네팔로 넘어왔고 친구는 터키를 돌고 네팔로 넘어왔다. 여행이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나있었다. 연락을 주고받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여행 기간이 길어 핸드폰 로밍 서비스는 애초에 이용할 생각도 못했다. 피시방이 있는 큰 도시에나 가야 겨우 메일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들이라 그것마저도 녹록지는 않았다. 메일하나 확인하고 보내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예상되는 여행의 변수만 해도 너무 많아서 언제 어디서 보자고 확실히 정할 수가 없었다. 대충 언제쯤 만나 히말라야 트레킹을 같이 하자고 말을 맞추긴 했으나, 여러 가지 정황상 우리가 진짜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높지 않았다.
심지어 카트만두에 도착해 며칠을 아팠다. 물이 안 맞았는지, 심하게 장염이 와서 며칠간 거의 죽다 살아난 직후였다. 도착하자마자 친구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벌써 연락을 못한 지가 2주는 지나 있었다. 만약 친구가 도착했다면 나를 엄청 찾고 있을 텐데. 약간의 기력을 회복하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거였다. 가족이나 친구가 너무너무 보고 싶던 와중이기도 했다. 여행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프니 원래 알던 사람들이 왠지 더 그리워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설마.
"진주야!!!!!!!!"
"어머나!!!!!!!!!!!!! 세상에!!!!!"
카트만두 길바닥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었다. 엉엉 눈물이 났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방방 뛰고 난리가 났다. 친구도 나도 서로 연락하러 피시방을 찾으러 다니던 길이었다.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는 말이 친구와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친구를 만나고 나서 거짓말같이 아픈 게 싹 다 나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향수병이었나 싶기도 하다.
#3. 열정만 많고 준비성은 없는 사람도 갈 수는 있다, 히말라야.
중국에서부터 만난 웨일스출신 친구와, 티베트에서부터 만난 우리보다 다섯 살 많은 한국인 왕언니, 그리고 친구와 나. 이렇게 넷이서 함께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내 맘대로 드림팀. 우리는 사실 열정부자인것 치고는 무지랭이였다. 웨일스출신 친구는 애초에 히말라야 트레킹은 생각도 없었는데, 갑자기 하게 된 바람에 무방비 상태로 스니커즈를 신고 합류했다. 우리 얘기를 듣다 보니 자기도 일생일대의 모험을 떠나보겠단다. 그렇게 그는 우리 팀의 청일점이 되었다. 나는 배낭과 여름 침낭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게 큰 자부심이었으나 준비물로 치자면 사실 그 친구와 별다를 게 없었다. 내 친구 진주는 앞의 두 명에 비해선 준비를 한 편인데, 몇 가지 물건이 더 있었을 뿐. 가장 큰 문제는 산악용 샌들을 신고 있다는 거였다. 셋은 그야말로 겁도 준비도 없이 불나방처럼 달려든 거나 마찬가지였다. 믿음직스러운 왕언니만이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필요한 준비물들이 웬만큼 있었다. 사실은 언니도 제대로 산을 다니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한없이 부족했으나 우리 곁에 있으니 완벽한 산악인으로 보였다. 언니는 우리 셋의 가방 속에 산행에 필요한 게 대체 뭐가 있는지 체크하며 당황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우릴 보고 걱정되는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정말 갈 거냐고 묻고 또 물었다. 그런 언니에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한국인 팀이 우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명색이 히말라야 트레킹인데 동네 뒷산 가듯 가볍게 생각하고 온 우리밖에.
트레킹 코스는 쭉 올라가는 코스와 빙글 돌아가는 코스 두 가지가 있었다. 쭉 올라가는 코스는 7-10일, 빙글 돌아가는 코스는 20일 정도. 별 고민 없이 모두 20일 코스로 가기로 했다. 서서히 고도를 높이면 고산병이 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고, 20일 정도의 기간 동안 찬찬히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히말라야 20일이나 등산했어'하고 뽐내고 싶은 허세 비슷한 감정도 있었던 것 같다. 만장일치로 코스를 정하고 우리가 할 일은 다 끝났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시작점은 카트만두에서도 한참 가야 하는 '포카라'. 그곳에 도착해 짐을 풀고 둘러보니, 작은 도시 어느 곳에서나 설산이 파노라마 뷰로 보인다. 산 근처여서 쌀쌀한 공기도 느껴졌는데 그것조차 이색적이었다. 며칠 후면 대망의 히말라야 -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시작될 것이다. 다행히 근처에 산악용품 파는 상점들이 있어서 꼭 사야만 하는 준비물을 구입할 수 있었다. 나는 겨울용 점퍼를, 친구는 신발을, 웨일스 친구는 방한용품을 구입했다. 최소비용을 추구하던 때라 몇천 원 정도 더 비싼 준비물엔 손도 못 댔다. 예를 들어 산악용 지팡이라든가, (얼음에서 걸을 수 있는) 아이젠이라든가. 나중에 보니 그것들은 설산에서의 필수용품이었는데. 이미 몇 개월의 여행으로 용기만 풀 충전이 된 우리에게는 사치품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
곧 시작될 트레킹을 기념하며 결의를 다지기 위해 우리는 최후의 만찬으로 백숙을 사 먹었다. 설산 아래에서 네팔의 쌀쌀한 공기를 잔뜩 느끼며 먹는 백숙의 맛은 일품이었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던 네팔리의 노래도 분위기를 더했다. 사실 한국에서 먹는 백숙과 별 차이는 없었으나, 긴 여행에서 오랜만에 먹는 한국음식이라는 점과 무시무시한 히말라야에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라는 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만들었다. 그 백숙은 내가 먹은 백숙 중 가장 결연하고도 비장한 백숙이었다. 아직도 기억의 방에 있는 걸 보면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커다란 백숙 한 마리로 배를 잔뜩 채우고 다음날, (겨우 약간의 준비가 된) 무방비 상태의 드림팀은 드디어 히말라야로 한걸음,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