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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May 24. 2024

목숨 걸고 한 히말라야 트레킹

히말라야에 뼈를 묻을 뻔했다 (히말라야 시리즈 3)

설산은 절대 만만하게 봐선 안된다. 멀리서 보는 설산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가까이서 접한 설산은 엄청난 굴곡덩어리였다. 그림에나 나올 법한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한없이 이어졌다 합쳐지며 원근법의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루치 장애물을 다 넘어야 미션 클리어.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눈더미를 하루종일 지나면, 로지 한두 개가 덩그러니 있는 곳에 도착해 하룻밤을 쉬어갔다. 그런 곳을 맨몸으로 덤볐으니, 큰일이 나도 날만했지 싶다. 설산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우리는 애초에 눈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잠깐 지나가는 설산일 텐데, 그 잠깐을 위해 등산용품을 산다는 게 아까웠다. 트레킹 상점에서도 그렇게 아이젠이며 지팡이며 꼭 필요하다고 몇 번을 사라고 권유했으나, 그들의 권유를 그저 호객 행위로만 받아들였던 우리였다.


처음에 눈 덮인 길이 나왔을 때 걱정이 안 된 건 아니었다. 벌써 절반은 왔는데, 이제부터 설산의 시작이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니 앞으로 며칠은 더 눈과 함께였다. 설산이 무서운 건 미끄럽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경험이 없으니 가늠이 안된다는 게 더 문제였다. 거기서 앞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뒤로 되돌아갈지를 결정해야 했다. 걱정은 되었으나 당연히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우리는 무조건 고였다. 포터들이 슬리퍼에 몸보다 큰 배낭을 메고도 설산을 평지 걷듯 가는 걸 보고, 우리도 당연히 그게 가능할 줄 알았다. 트레킹을 완주하면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겁 없이 달려들었을까. 첫날의 눈 덮인 길은 그럭저럭 갈만 했지만, 올라가면 갈수록 태산이었다. 하루종일 한없이 만년설이 쌓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우린 지칠 대로 지쳤다. 미끄러우니 온몸에 긴장이 되고 긴장이 되니 종종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종종걸음을 걷다 지쳐 쉬면서 보는 풍경은 한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지만, 망망대해 같은 눈 덮인 길이 한없이 펼쳐져 있는 바람에 그 풍광을 온전히 즐길 수가 없었다.




그날은 한참 걷다 보니, 저 멀리 스키 슬로프 같은 길이 보였다. 그 길을 지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목적지로 갈 수가 없는 그 길목에. 앞서간 사람들은 미끄러지지 않고 훈련받은 병정들처럼 차곡차곡 잘도 걸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겐 아이젠과 지팡이가 있었으니까. 우리 팀 중에선 한 명도 그걸 가지고 있지 않았다. 롱다리 조지가 먼저 겁 없이 그 길을 내려갔는데, 마치 서서 스노보드 타듯 쓱 순식간에 갔다. 그 모습을 보고 '별거 아니네'하면서 길을 다시 봤는데, 아니 이 경사를 저렇게 겁도 없이 내려갔네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두 번째로 왕언니가 갔다. 언니는 가다가 넘어지고 가다가 넘어지고. 그러다 나중에는 그냥 풀썩 주저앉아 가방에 앉아 썰매 타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겁이 덜컥났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든 그 길을 지나가야 하니까. 나는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 아니다. 스키도 썰매도 다 무섭다. 스키는 아무리 배워도 만년 초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안전장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스키 슬로프 같은 그 길 중에서, 가장 경사가 완만해 보이는 곳을 골랐다. 그 길을 배낭을 타고 양 옆의 발을 브레이크 삼아 온갖 소리는 다 지르면서 진주와 함께 내려갔다. 이러다 죽을지도 몰라 생각하는 순간 슬로프 아래에 도달해 있었다. 마법의 양탄자를 탔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순식간에 내려가고서 '또 한 고비 넘었네.' 한숨이 났다. 다음은 또 어떤 고비가 기다릴까.


처음엔 산을 걸으며 이야기도 하고 말장난도 하고 화기애애하게 가는 편이었는데, 몇 번의 긴장감을 맛보고 나서는 다들 말이 없어졌다. 그저 뚜벅뚜벅 걸을 수밖에. 거기서부터는 진짜 체력전이라, 나와 친구가 계속 뒤처지기 일쑤였다. 언니와 조지는 가다가 우릴 챙기다가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지쳤는지 우릴 기다리지 않고 한참이나 먼저 갔다. 우리도 그러길 바라고 있었다. 우리 때문에 모두가 뒤쳐지는 게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이제 한두 시간 정도 후면 해가 질 것 같은데, 아직 로지는 코빼기도 안보였다. 겁이 덜컥 났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에 로지에 도착해야 했을 시간이다. 해가 지면 이 눈길에서 더 길이 안 보일 텐데. 나와 친구는 서둘러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더 서두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무섭다, 힘들다 이런 단어는 암묵적으로 동의한 금기어였다. 서로 괜찮다고 금방 갈 수 있다고 얘기하면서도 겁이 난 게 다 보일만큼 우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열심히 가다 보니 저 멀리 로지의 불빛이 반짝이는 게 어렴풋하게 보였다. 이제 마지막 굴곡이 남았다. 저 언덕만 잘 넘어가면 된다. 해가 질 시간이 다가와서인지, 길이 조금 더 미끄러워진 게 느껴졌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조심 걷다 숨이 차서 잠깐 숨을 고르는 동안, 진주가 앞으로 가다 살짝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면서 옆으로 틀어 눈밭으로 철퍼덕 넘어졌다.

"괜찮아?"

"응, 여기 미끄러운 것 같아. 이쪽으로 오지 마!"

진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괜찮은가 보려고 이미 나도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미끄러졌는데 당황스러울 만큼 속도가 빨랐다. 진주가 한번 미끄러진 길이라 가속도가 붙은 듯했다. 으아아아아악 미끄러지며 확 넘어지기까지 해 얼굴로 얼음을 쓸며 내려갔다. 그 와중에 멈춰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멈춰지지 않았다. 이대로 미끄러지면 저 밑은 낭떠러진데 하는 생각을 했던가, 아무 생각도 안 했던가.


그때 뒤에서 덥석 배낭을 잡는 구세주 같은 손길이 느껴졌다. 그 손길이 브레이크가 되어 90도로 떨어지는 굴곡진 곳에서 앉은 자세로 멈췄다. 저 밑에 낭떠러지로 나와 함께 미끄러진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순식간이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진주의 손이 나의 동아줄이었구나. 심장이 너무나 쿵쾅쿵쾅 대서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옆으로 돌아서 조심조심해서 와, 내가 그대로 배낭 잡고 있으니까."

말이라도 크게 했다간 놀라 더 미끄러질까 진주가 아주 차분히 속삭이듯 말했다. 차분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손은 온 힘을 다해 내 배낭을 꽉 잡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앉은 자세로 천천히 후들거리는 발을 들어 일어나기 좋게 옮겼다. 그러고 나서 또 천천히 일어나 온 다리에 힘을 줬다. 너무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아기가 처음 발걸음을 떼듯 모든 걸음을 신중하게 하나하나 골라 계산하여 한 걸음씩 갔다. 여기서 발을 잘못 디뎠다간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긴장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 겨우 길로 돌아와 서서 미끄러진 아래쪽을 보니 저 밑으로 떨어지면 뼈도 못 찾겠다 싶을 만큼 깊고 아득했다. 정말 그날 난, 진주가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진주의 순간적인 판단력과 내 배낭을 죽을힘 다해 붙잡아준 그녀의 용기 덕에 살았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두근두근 덜덜 떨리는 몸으로 방금 전의 무시무시한 일에 대해 말할 겨를도 없이 눈 덮인 산에 저녁노을이 드리워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 속도라면 이런 길을 아직 한 시간은 더 가야 하는데. 지체하면 안 되었다. 이 마지막 고개를 무조건 넘어가야 한다. 일단 그곳을 빨리 벗어나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너무 놀랐고 눈물 나게 고마워서 하고 싶은 말이 가득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하면 안 되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감정이 터져 눈길을 걷는데 방해만 될 것 같았다. 다 나중으로 미뤄두고 일단은 걸었다. 걷지 않으면 눈밭에 진짜로 파묻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가는 동안에 해는 다 지고 핸드폰 불빛에 의존해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걷고 또 걸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해져서야 우리는 겨우 로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며, 너희들 안 와서 무슨 일이 난 줄 알았다며, 얼굴에 난 그 상처는 또 뭐냐며. 왕언니의 속사포 같은 물음에 긴장이 확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모르게 참았던 울음이 팡 터졌다.

"저 죽을 뻔했는데 진주가 구해줬어요. 저 진짜 거기서 떨어지면 낭떠러지였는데. 진주가 필사적으로 잡아줬어요."

"네가 거기서 떨어졌으면, 너 찾을 때까지 나도 아무 데도 못 가. 살아줘서 고마워. 엉엉"

우리는 카트만두에서 처음 우연히 만난 날처럼 또 부둥켜안고 울었다. 울면서 알아듣지도 못할 감사의 인사를 하고 또 했다. 그날 난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만큼 진주에게 빚을 졌다. 내 생명의 은인. 우리가 만날 때마다 이 일은 우리의 눈물버튼이자 안줏거리가 되었다. 카트만두에서부터 진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상상만 해도 아득하다. 엄마가 넌 사주에 인복이 좋다고 항상 말하곤 하셨는데, 그때 진주를 보면서 절절하게 느꼈다. 정말 인복이라는 게 있다면, 그 인복이 나를 살렸나 보다. 진주의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은 내 마음에 깊이 남아 영원히 진주알처럼 반짝일 거였다.




우리 둘 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끙끙 앓았다. 모든 기력을 다 소진해 버린 듯했다. 너무 힘들어서 타이레놀을 먹고 아픈 얼굴을 치료할 생각도 없이, 드르렁 쿨쿨 깊이도 잠이 들었다. 다음날의 산행이 또 우릴 기다리고 있었고, 이 지긋지긋한 설산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더 이상 어떠한 일도 겪고 싶지 않았고, 이 트레킹이 무사히 끝날 수 있기만을 꿈에서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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