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히말라야 시리즈 4)
넘어지면서 얼굴에 죽 그어진 상처가 났는데, 마땅한 연고도 없었다. 상처 연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그 당시엔 별로 중요하지도 않게 생각했다. 딱지 생기고 나면 저절로 회복되겠지 싶었다. 그런 나보다 진주가 내 얼굴을 더 걱정했다. 그녀는 길을 걷다가 발견한 커다란 알로에 한 덩이를 맥가이버 칼로 썰었다. 그리고 그걸 작게 잘라 내 얼굴에 붙여주며 손으로 떨어지지 않게 꼭 대고 있으라고 했다.
어렸을 때 동생이랑 싸운 적이 있었는데, 열받은 동생이 내 얼굴을 긁어서 손자국대로 패인 적이 있었다. 엄마는 민간요법이라고 하면서 알로에를 잘라 상처에 붙여주셨다. 알로에는 처음 붙이고 있을 때는 잘 흘러내리는데 시간이 지나 마르면 떡하니 잘 달라붙어 있다. 알로에 덕분인지, 자가치유능력 덕이었는지 패인 상처에 금방 살이 차올라 감쪽같이 다 나았었다. 진주가 알로에를 잘라서 붙여주자, 그 기억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야 너 우리 엄마 같아!! 상처 나면 엄마가 어렸을 때 알로에 붙여줬는데."
"어머님은 잘 계시냐? 집에 연락 안 한 지도 오래됐다."
"우리 집 나온 지 세 달 다 돼간다, 벌써?"
"그러게. 시간이 빠르다. 올해 정말 다이내믹하다."
"하아 집에 가고 싶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깜짝 놀랐다. 집이랑 원수진 사람처럼 아플 때 빼고는 웬만해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었는데. 여행하면서는 집에 연락하기도 힘들어서 오죽하면 엄마가 대사관에 신고할 뻔한 적도 있었다. 모범생 딸이 사춘기가 이제야 왔다며 전화만 하면 얼른 빨리 집에 오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우리 집에 한비야 같은 애가 있다고 모험심이 대단하다며 친척들 앞에선 나를 추켜세우는 중이었다. 엄마의 이중성이 그 당시에는 거슬렸다. 게다가 내가 벌어 모은 돈으로 떠난 여행이었어서 더 제멋대로이기도 했다. 독립심에도 예의가 있었다면 좋았을 걸. 생전 처음 생긴 나의 반쪽자리 독립심은 '무슨 애처럼 집에 맨날 보고하겠어' 하는 생각을 더욱 강화시켰다. 나중에 너 같은 딸 낳아서 맘고생 좀 해보라며, 엄마가 얼마나 서운해하셨는지 모른다.
알로에를 붙인 덕에 나을 줄 알았던 얼굴의 상처는 알로에의 독 때문에 난리가 났다. 산에서 막 뜯은 알로에 안에는 독성이 있었는지, 상처부위에 알레르기까지 생겨버렸다. 그 덕에 상처가 더 심해졌는데, 쓰리면서 가렵기까지 해서 수습이 안되었다. 그걸 보고 진주도 깜짝 놀라 배낭 옆에 꽂고 다니던 커다란 알로에를 휙하니 산에 다시 돌려놓았다. 한동안 흉터 같은 선이 생겼지만 워낙 회복력이 좋을 때여서 시간이 지나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무슨 자연인들도 아니고, 산에 있는 건 함부로 뜯지 말라는 교훈을 우리는 체득했다.
트레킹이 반이상 넘어가자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특히나 설산을 넘어오고 나서부터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체력이 달려서인지 걸어도 걷는 게 아니었다. 발은 기계적으로 계속 걷고 있었지만 배낭의 무게는 두 어깨 가득 느껴졌고, 쉬어도 쉬어도 피로는 내게 매달려 있었다. 내가 왜 이걸 20일이나 한다고 했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진주가 어느 날부터 발이 아프다고 했다. 가만 보니 발톱이 까매져 있었다. 그냥 두면 발톱이 빠질 것 같았다. 트레킹이 일주일도 남지 않을 때였다. 걱정이 된 나는 진주에게 나을 때까지 며칠 좀 쉬었다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진주는 단호했다. 며칠만 참고 완주한 후에 병원도 가고 그때 쉬겠다고 했다. 발톱은 화장지로 칭칭 감아 고무줄로 고정시켰다. 신발이 불편하니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나중엔 그 슬리퍼가 발톱을 누르자 슬리퍼의 앞쪽을 잘랐다. 그리고는 스카프로 칭칭 감아 슬리퍼를 고정시켜 걷기 편하게 만들었다. 진주는 손재주가 좋았다. 기어이 트레킹을 끝내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핸드메이드 신발 덕에 우린 예정대로 완주할 수 있었다. 모두 진주 신발에 감사 인사를 했다.
트레킹은 마지막 날까지 쉽지 않았다. 산에서 다 내려와 버스정류장까지 가야 하는데, 거기까지가 몇 시간이었다. 도로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먼지 가득한 흙길이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모래바람이 일었다. 그 모래를 온몸으로 맞으며 걷는 통에, 우리는 어느새 각설이 타령을 부를 것만 같은 상거지 4인방이 되어 있었다. 한 명은 얼굴에 상처가 있고 한 명은 제대로 된 신발도 안 신고 있고. 피곤하고 힘들고 먼지를 뒤집어쓴 자태로, 가장 가고 싶었던 한국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주인의 눈이 동그래지며 “현지인들이 한국말을 할 줄 아냐“며, ”어디서 한국말을 배웠냐“고 질문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시커메진 얼굴들을 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깔깔 웃었다. 드디어 기나긴 여정의 막을 내린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트레킹 완주의 기쁨은 느낄 새도 없이, 일단은 먼지부터 처리하고 진주를 병원에 데려갔다. 여행하면서 느낀 네팔의 의료는 기대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외국인이 네팔 병원에 온 게 신기했는지, 온갖 과의 의사들이 여기저기서 나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은 진주 발톱 앞에 모여 사뭇 심각한 얘기를 나누더니, 한참 지나 결론을 내렸다. 발톱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알겠다고 오케이를 했는데, 세상에나 마취도 하지 않고 진주 발톱을 뜯어내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진주는 소리 지르는 것도 잊었다. 너무 아파서 머릿속이 하얘졌는데, 정신이 돌아오고는 의사의 멱살을 잡을 뻔했단다. 이미 많이 뜯겨있는 발톱이긴 했지만, 얼마나 무시무시한 치료란 말인가.
그 정도였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진주의 발이 붓기 시작했다. 발톱 사이로 먼지며 모래 바람이 하도 많이 들어가 염증이 생긴 것이다.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 점점 더 발이 부어올랐다. 처음엔 피곤해서 부은 줄 알고 쉬면 낫겠지 하며 방치했다. 네팔 병원의 경험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부을 뿐만 아니라 색깔도 얼룩덜룩하게 변해갔다. 트레킹 후에 인도로 넘어가 있었는데, 하는 수 없이 또 병원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조금만 이상해도 바로 나가자며 경계태세로 병원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외국인이 마치 동물원 원숭이인 듯 의사들이 떼로 몰려왔다. 한참의 의논 끝에 그들이 내린 확신 없는 결론은 “다리가 썩어가고 있으니,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독한 의사들. 다리를 잘라야 한다니. 듣도 보도 못한 무서운 말을 웃으며 내뱉다니.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나라가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와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병원을 갔더니, 군대에서 행군할 때 많이들 걸린다는 봉와직염이라고 했다. 항생제만 먹어도 쉽게 나을 수 있는데, 다리를 잘라야 한다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트레킹은 나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것들을 남겨주었을까.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 인생을 많이 배웠던 것 같다. 물론 내 인생의 항로 중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다지고 다져져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힘든 일 없이 장녀로, 모범생으로 평탄하게만 살아왔던 나에게 그 시절의 경험은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웬만한 큰일도 덤덤하게 넘길 수 있는 것은, 큰 고비를 한번 넘겼고 힘든 매일을 버텨냈기 때문인 것 같다. 왜 남자들이 군대 갔다 오면 성숙해진다고 하는 것처럼. 나의 일부가 좀 더 단단해지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했달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원래도 소중했지만, 더 의미가 깊어진 나의 평생 친구와 함께했다는 것.
아이가 스무 살이 되면 아이와 남편과 함께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기로 했다. 그땐 더 짧은 코스로, 철저하게 준비해서 안전하게 다녀올 예정이다. 그러려면 저질 체력으로 바뀐 나의 체력관리부터 시작해야겠다. 오십이 넘어서가는 히말라야는 어떤 모습으로 날 반겨줄지, 한편으론 두려우면서도 벌써부터 두근두근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