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버른에서 먹는 애증의 coffee
어릴 적부터 장이 예민했다. 돼지고기나 찬 걸 먹으면 바로 화장실행이었고, 더 커서는 맥주만 마셨다 하면 싸르르. 삼겹살에 맥주면 최소 하루종일 뱃속 전투에 응해야 했다. 나의 장은 혹시나 남들과 달리 일자인 게 아닐까 의심을 한 적도 있었다. 커피도 마시기 힘들었다. 카페인에 민감한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커피를 마시면 바로 오는 신호 때문에 귀찮은 일들이 많이 생겨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다닐 땐, 1교시에 마시는 달콤한 맥심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끊을 수가 없었다. 그땐 어느 화장실이 주로 비어있는지 파악하는 게, 수강신청만큼 중요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장의 반응속도가 빠른 몇 가지 음식들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중 하나가 커피였는데, 어쩌다 보니 커피를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닌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 12년 차이고 2년에 한 번 정도 이사를 다녔는데, 그때마다 우리만의 커피 아지트가 있었다. 남편에게는 이사 간 곳에서 커피 맛집을 뚫는 게, 전입신고 같은 행정업무 처리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네이버나 카카오맵으로 검색해서 후기를 보기도 하고, 내가 맘카페에 물어보기도 했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꼭 한두 개씩은 커피 맛집을 찾아냈다. 카페를 여기저기 가봐야 해서 발품을 팔아야 하긴 했지만, 이제는 이사 의식 같은 게 되었다. 맛있는 카페를 찾았을 때의 성취감이란. 어느 동네를 가도 꼭 한두 명씩 방망이 깎는 노인 같은 커피 장인은 있기 마련이어서, 커피가 끊길 일은 없었다.
호주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도, 다름 아닌 커피 맛집을 미리 찾아놓은 것. 커피 없이 못 사는 남자를 데리고 살고 있으므로, 맛있는 카페 검색이 1순위다. 어떤 여행이든 어디로 갈지 정하고 비행기표, 숙소를 예약하고 나면, "자, 어디 맛있는 커피를 찾아볼까."로 커피여행은 시작된다. 구글맵으로 커피 맛집을 미리 몇 개 찾아서 표시해 놓는 것까지가 여행 가기 전까지의 할 일. 여행지에 가서 카페와 가까운 주변의 관광지를 검색한 후, 그날그날의 여행 루트를 설계한다. 구글맵에 있는 카페 후기는 꼼꼼하게 다 읽어보기도 한다. 남들은 여행 루트를 먼저 짜고 근처에 있는 카페를 검색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다. 커피가 빠진 여행은 만두소가 채워지지 않은 만두껍데기를 먹는 것과 같다나.
호주의 카페는 대부분 전문성이 있다. 그래서 여러 명의 카페 직원들에게는 각각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 생원두를 감별하는 큐그레이더, 원두를 볶는 사람, 맛을 감별하는 테이스터, 브루잉하는 사람, 라테아트 전문가, 마케터등. 그리고 커피 원두 각각의 특성에 따라 볶는 시간과 온도가 정해져 있고, 그것을 까다롭게 지킨다. 그래서 커피를 태우지 않기 때문에 원두 특유의 신맛이 있다. 가히 커피 장인의 나라라 불릴만하다. 인기 있는 카페에서는, 주문받는 직원이 카페에 왔던 손님들과 그들의 취향을 기억한다. 그래서 두어 번 방문한 손님에게는 지난번과 같은 커피를 마실지 묻기도 한다. 그들의 사소한 듯 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기억이 손님들에게는 감동포인트다.
맛있는 카페는 거의 골목에 있고 카페 간판이 없는데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찾기 어렵진 않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거나 줄 서 있다거나 하면, 바로 그곳. 큰길로 지나가다가 '아 이쯤 있을 것 같은데'하고 작은 골목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로 포화상태인 카페가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부 공간이 협소하다는 점. 그래서 카페 밖에 네모난 플라스틱으로 된 초록색 우유통을 뒀는데, 카페 내부에 앉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좌석이다. 성수동이나 힙지로의 핫한 카페들에서는 내부에 우유통을 둬서, 인테리어 효과를 톡톡히 보기도 한다. 그게 호주에서 비롯된 거라니, 우리의 활용능력과 창의력은 단연 세계 최고인 것 같다.
사실 커피맛으로만 따지면야 호주 커피가 당연히 압승이지만, 카페 공간의 아쉬움을 따지다 보면 한국 카페가 그리워진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카페를 좋아하지만 관점이 다르다. 남편은 커피맛이 중요한 사람이고, 나는 카페 공간이 중요한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호주 카페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에 갔을 때, 의자도 없는 에스프레소바에서 사람들이 서서 에스프레소를 원샷하고 바로 나가는 걸 보고, 문화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지금이야 에스프레소바가 한국에도 생겨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그때는 간판을 확인하러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카페라는 건,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집과는 다른 공간에서 책 읽거나 공부하고 싶을 때, 도피처로 활용하던 공간이 아니던가.
호주의 카페가 맘에 들었던 부분은 디카페인 커피가 어딜 가나 있다는 점. 그리고 라테를 주로 마시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우유 종류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락토프리 밀크, 오트밀크, 아몬드밀크 등. 나 같은 과민성 대장증후군에게도 디카페인, 오트밀크로 만든 라테류라면 지속적으로 편안한 장 상태를 선사해 준다. 매번 화장실을 찾아 헤매는 불안한 눈길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베스트 커피는 디카페인 오트밀크로 만든 플랫화이트다. 한국에서는 맛이 너무 진해서 사약을 들이켜는 듯한 느낌에 플랫화이트는 잘 안 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한입 마신 플랫화이트는 지금껏 접해보지 못했던 신세계다. 쓴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실키하고도 부드러운 목 넘김. 어릴 때 떠먹는 젤리를 처음 먹을 때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지금껏 나의 인생여행지를 꼽으라면 단연코 프랑스가 1위였는데, 프랑스는 모든 면에서 매력적인 곳이지만 커피만큼은 아쉬움을 철철 남긴 곳이었다. 다른 장점들로 커피의 아쉬움을 달랬던 곳. 하지만 이곳 호주는 특히 멜버른은 유럽의 감성에 커피맛도 가진 곳이다. 여행에서 한 가지 요소라도 탁월한 게 있으면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무래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곳의 플랫화이트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매거진에 있었던 글을 발행 취소하고 브런치북으로 옮기느라 달아주신 소중한 댓글들이 삭제되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