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표 영어의 성공 요인

영어도서관을 차리는 게 어때?

by 초코파이

아이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 전집 열풍이 휘몰아치고 있던 자리를 영어 열풍이 태풍처럼 다가와 덮어쓰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작은 시골 동네였는데도, 엄마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렇게 다들 영어유치원 얘기를 했다. 심지어 그 동네에 영어유치원이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었는데 거기를 보낼지, 아니면 영어학원을 보낼지 그게 가장 큰 이슈였다. 대치동 애들은 어떻다더라 하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도 난무했다. 아이 교육에 관심만 많았지 영어를 어떻게 시켜야 할지 하나도 모르던 나도, 그 열풍에 휩쓸렸다.


이리저리 찾아보며 고민고민하다가, 당시 유명했던 영어책 전집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영유나 영어학원은 애초에 뒷전이었다. 내 아이의 성향과 안 맞을 것 같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매달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아깝다는 게 두 번째였다. 사실은 마땅히 보낼만한 곳도 없었다. 남편은 반대였다. 어차피 나중에 이사를 갈 예정이니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영유를 보내면 어떻냐는 의견이었다. 영어를 어떻게 시켜야 할지 둘 다 잘 모른다는 점과 집에 책이 더 늘어나는 게 싫다는 이유를 들었다. 사실은 점점 세력을 넓혀가는 아이의 책들에, 마지막 남은 책장 한 칸을 뺏길까 두려웠던 것이 반대의 가장 큰 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 교육은 내가 전담하고 있었으므로 남편의 의견은 참고용이었을 뿐, 그의 발언권은 새똥처럼 작았다.




영어책을 파는 영사님은 무슨 전공이신지 궁금해질 정도로 발성이 좋았다. 가지고 오신 대표 책들을 꺼내셔서 일렬로 늘어놓으시더니 아나운서처럼 깔끔하게 책 설명을 시작하셨다.

"어머니, 저희 책은 영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배우기 쉽도록 만들어진 책입니다. 이 깔끔한 어순과 단어들을 보세요. 실제로 원어민들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들 위주로 만들었고요. 음악은 또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이들에게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 아시죠?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음원도 만들었답니다. 귀에 쏙쏙 박히실 거예요.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네, 뭐. 한 번..."

대답을 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영사님께서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일어나셨다. 뭘 하시려는 거지? 의심의 눈초리는 가볍게 무시하신 채, 목을 가다듬으신 영사님은 양손을 곱게 모으셨다. 그리고는 목청껏, 온 힘을 다해 소프라노 톤으로 책에 나온 대표곡 노래를 불러주셨다.

"어떠세요, 어머니?"

"아, 음원은 정말 좋긴 좋네요."

"한 곡 더 들어보시겠어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나는 무언가 웃긴 와중에도 웃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었고, 내 표정이며 태도가 애매하다고 생각하신 영사님은 같은 소프라노 톤으로 그다음 노래를 들려주셨다. 뜻밖의 웃참챌린지가 시작되었다.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추는 조건반사가 있던 아이는, 영사님의 두 번째 노래부터는 거기에 맞춰 개다리춤을 추었다. 내 반응을 보시며 몇 곡이라도 더 부르실 기세여서, 영사님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나는 와하고 박수를 치며 화답을 해드렸다. 집안은 작은 콘서트홀로 변신했다.


우리의 반응에 만족하신 영사님은 그제야 앉으시며 주섬주섬 계약서를 꺼내셨다. 이건 뭐, 집에서 콘서트까지 열어주셨는데 계약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어차피 책을 사려고 부른 거긴 하지만, 이렇게 비싼 전집을 고민한 번 안 하고 쉽게 계약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영사님은 고수였다. "아이가 참 영특하네요." 계약할 때 들었던 이 말을 되뇌며, 내 아이는 곧 영어천재로 거듭나지 않을까 헛된 희망회로를 돌렸다. 그 말의 참 뜻은 "노래 몇 번에 이렇게 쉽게 결제를 해주시다니, 호구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거였을 텐데. 또 한편으로는 영사님이 이 정도인데, 직접 수업하는 선생님은 얼마나 더 대단할까, 수업은 얼마나 재밌을까 혼자 황홀해졌다.



선생님도 단 한 명뿐이던 우리 동네. 우리 집에 배정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마냥 기다려야 하냐니까 꾀꼬리 같은 영사님은 책 노래를 많이 들려주란다. 그러면 아이가 익숙해져서 수업할 때 거부감이 없어질 거라며. 집에 CD를 틀어놓으니, 청각이 예민한 내 아이는 처음엔 미동도 안 하고 열심히 들었다. 그런데 책 개수는 50권 남짓, 한쪽에 한두 줄짜리 쉬운 책이라 아이는 하루에 30권씩 들어버렸다.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책 전체를 이미 몇 번씩 다 들어본 아이는 이제 그 책들을 지겨워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 있다가 선생님이 오셨다. 일단 아이는 책에 흥미가 떨어진 상태였고, 선생님은 처음부터 영어로만 말을 하셨다. 원래도 낯을 가리는 아이였는데, 선생님은 성악가처럼 노래를 불러주지도 않았고, 영어로 계속 질문만 하셨다.

"Come, little boy. What is your name?"

"무슨 말인지 몰라요. 엄마, 뭐라고 하는 거야?"

"No, no. English."

기본적인 영어 회화를 하나도 모르던 아이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계속 말을 걸자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다. 아이는 도망가고 선생님은 쫓아가 괜찮다고 하며 계속 영어 대화를 시도하는 이상한 상황이 수업 내내 계속되었다. 게다가 선생님은 지나치게 가까이서 마주 보고 말을 하는 습관이 있으셨다. 선생님의 커다란 리액션과 큰 목소리, 말할 때마다 커지는 큰 눈과 커다란 입을 눈앞에서 너무나도 가까이서 보며, 아이는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든 적응을 시켜보면 괜찮을까 싶어, 조금만 떨어져서 얘기를 해주실 것과 살짝 한국어를 섞어서 수업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한국어도 영어처럼 말씀하시는 바람에 점점 더 거부감이 심해졌다. 분명 한국인인데, 한국말도 잘하시는데, 영어를 하면 한국어 발음을 잊어버리시나? 갑자기 전청조식 영어를 섞어 쓰셨다.

"What's your name? your e-reum?"

뭔가를 요청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아이는 선생님만 오면 꽁지 빠지게 도망을 갔고, 나도 선생님의 이상한 영어에 굳이 아이를 달래서 계속 수업을 시켜야 하나 회의감이 들었다. 4번의 수업만에 우리는 수업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 영어 거부가 온 아이에게 근 2년을 영어의 영자도 꺼내지 않고 영어전집세트도 동생에게 줘버렸다. 수업을 할 거면 선생님을 잘 선택해서 하라는 말과 함께.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영어를 까맣게 잊은 아이에게 다시 영어를 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크기도 했고, 이번 타이밍을 놓치면 언제 또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낯선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성향 그대로였고, 영어 수업에 실패한 적이 있으니 이번에는 엄마표 영어를 택했다. 나의 한국식 발음이 걱정되긴 했지만, 아이 어릴 때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표 영어의 중심은 책과 영상이었다. 하지만 나의 첫 영어전집 실패를 알고 있던 남편은 이번엔 결사반대를 했다. 제발 나중에 연수를 다녀오자는 둥, 어차피 이사가 얼마 안 남았으니 그때 영유를 보내자는 둥,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어필을 했다.


나도 실패를 인정한 후부터는, 남편을 설득할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대체 뭘로 설득을 시킨단 말인가. 일단 엄마표 영어책 몇 권을 사서 정독을 한 후, 내 아이에게 맞을 것 같은 방법을 맞춰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아이가 영어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게 우선순위라는 생각이 들어서 전집은 보류하고, DVD만 한 세트 샀다. 시작은 아이에게 영어 영상 보여주기. 영상 노출이 많이 안되어 있던 아이라, 영상에 금방 빠져들었다. 영상을 볼 때 옆에 있어주며, 웃긴 것 같은 포인트에서 박장대소를 하고 함께 웃었다. 그렇게 한 달을 매일 30분씩 같은 영상만 보더니, DVD 한편을 다 외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입으로 줄줄 말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놀랐지만, 남편은 나보다 훨씬 더 놀란 것 같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냐, 우리가 미국인을 낳았던 거냐며 너 알아서 뭐든지 다 하라고 했다.


책 앞에 동그란 스티커 작업


그렇게 영어 그림책 전집을 구매했다. 이번 전집은, 지난번 것보다 가격이 두 배가량 비쌌다. 하지만 아이가 일단 영어에 거부감이 사라졌으니 잘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처음 한 일은 단계별로 책을 나눈 것. 파워 P인 엄마가 처음으로 J로 변신해 인터넷으로 책의 AR을 하나하나 검색해서 사서처럼 모든 책에 스티커를 붙였다. 그러고는 낮은 단계부터 하루에 CD 한 개 정도를 매일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들어! 하고 들려준 게 아니고 그냥 배경음악으로 잔잔히 틀어놨다. 나중에 아이가 '엄마 이건 무슨 책이야?' 물으면 그제야 책을 꺼내서 함께 보고 다시 한번 읽어주거나 펜으로 찍어보거나 했다.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나도 편하고 아이도 편하게 그렇게 일 년 정도, 아이는 내가 산 그림책을 다 들으며 영어를 익혔다. 아이는 영어를 좋아하게 됐다.


나중에는 펜으로 영어를 한 글자씩 찍어보며 읽는 것도 스스로 깨치게 되었다. 뭐든 때가 있고 아이마다의 속도대로 하는 게 그래서 중요한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읽기 시작하면서 점점 책 수준은 높아지며 나중에는 챕터북에서 소설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으로 갔다. 물론 엄마표 영어의 한계는 분명히 있다. 처음에 줄줄 영어를 말하던 아이가 말하는 환경이 되지 않으니, 나중에는 한마디도 영어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쓰기를 해서 정형화된 쓰기가 잘 안 되고 스펠링 실수가 꽤 있다는 것. 이젠 내수 준보다 훨씬 높아진 아이에게 어떻게 영어를 시켜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지금이 영어학원을 보낼 타이밍인가 보다.)


사실은 아끼려고 아꼈던 건 아니었는데, 아이의 성향과 주변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엄마표를 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영어유치원 비용도 절약, 영어 학원비도 절약했다고 남편에게 생색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영어 전집과 영어 책들에 대한 남편의 잔소리도 영원히 쏙 들어갔다. 교육비를 아껴서 남편은 행복했고 아이는 영어를 좋아하게 됐고 나는 처음으로 내 쇼핑이 옳았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야말로 윈윈윈. 또 한 번 책장은 넘치는 책에 부대끼게 되었지만, 어떤 관점으로 봤을 때도 남는 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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