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락서 Jul 18. 2018

행복으로 가는 길

[지나가는 이야기]#8

  쉽지 않은 길이었다. 몇 날 며칠을 걸었는지 가늠이 힘들 만큼 행색이 초라한 나그네는 모처럼 완만한 평지에 다다라 숨을 돌렸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으나 허리 높이까지 자란 갖가지 수풀만이 빽빽이 보여 자신의 발자국조차 찾기 힘들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히는 청량한 바람이 나그네 허리춤 근처 수풀을 간질였다. 갈증이 일었다. 일, 이 분 즈음 걸었을까. 세상 끝까지 펼쳐져 있을 것만 같던 풀숲이 갑작스레 자취를 감추고 작은 공터가 드러났다. 육십 대 즈음되었을까? 젊다고 하기엔 세월의 흐름이 얼굴 주름마다 부드럽게 스며들어있었고, 늙었다 하기엔 생생한 기운을 한껏 몸에 두르고 있어 보였다. 나그네는 묘한 노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나무 등치에 기대고 가방 속 물통을 꺼내 목을 축였다. 그간 여정에서도 종종 지나는 사람을 만나왔으나 지난 며칠은 도통 사람 그림자도 못 본 탓인지 노인이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아서인지 얕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할 뿐 부러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연유로 사방이 풀로 뒤덮인 이 곳에서 지내는 것일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낯설 뿐이었다. 메말랐던 목에 푸른 하늘을 담은 물을 흘려보내고 이마에 흐르던 뜨거운 땀이 다 식어갈 때 즈음이었다.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인지 나그네 자신보다도 더 지쳐있는 남자가 공터로 걸어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지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으나 그 남자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노인을 찾아내고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노인 앞에 무릎을 꿇고 무언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터가 그리 넓지 않았고 그 남자의 목소리가 워낙 컸던 터라 나그네 역시 들을 수밖에 없었다. 흔하다면 흔하지만 마냥 편하게 듣기엔 마음이 아린 사연이었다. 정년이 되기도 전에 찾아온 정리해고, 어떻게든 계속 살아보고자 시작한 창업의 실패. 남자는 벼랑 끝에 몰려있었다. 나그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에도 구구절절 절박함이 선연히 드러나 보였다. 한참을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던 남자는 노인에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제발 제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십쇼. 남자의 사연에 말 한마디 하지 않던 노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평안해지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에 남자는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감사하다는 인사를 여러 차례 건네고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다른 방향에서 수풀을 해치고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내가 모르는 법칙이라도 있는 듯 그 남자 역시 고개를 돌려 노인을 찾아 좀 전에 사라진 그 남자처럼 노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고 처분을 기다리듯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또 말없이 한 방향을 가리켰고 남자는 그 방향으로 뛰어갔다. 마치 이 작은 공터가 만남의 광장인 듯 그 이후로도 몇 명이 찾아와 노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에 나그네는 호기심이 생겨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 어르신은 어떤 대단한 분이시기에 이곳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십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저야 그저 별 볼일 없는 노인일 뿐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어르신을 찾아 이곳에 오고 정답을 찾은 듯 사라지는 모습을 벌써 여러 명 보았는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보기에는 어르신은 한 사람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시는 현자 같습니다.” “허허. 이 노인은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막힘없이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저는 하나의 유일한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길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길이 있다는 사실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길이 잘못된 길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그네께서는 무엇 때문에 길을 걷고 계셨습니까?” “무엇이라 특정 지어 말하기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막연히 떠올려본다면 행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행복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 찾지 못하였으나 분명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혹여 그 길이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요?” 나그네는 충격을 먹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노인은 계속하였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양한 삶을 살아가지요. 세밀히 들여다보면 분명 제각각의 길을 걷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겉보기에 유사해 보임은 모두가 행복을 바라며 걷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다양한 사람이 행복을 찾아 길을 걷고 있는데 어찌 행복으로 가는 길이 하나일 수 있겠습니까? 행복으로 가는 길은 실로 하나의 길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르신의 말씀에 마음 깊이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들은 어르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리도 기분 좋게 향하는 것일까요?” “저는 행복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아갈 곳이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지요. 막막하던 이들의 삶에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미천하지만 제 작은 노력으로 뭇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음에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스스로가 대단치 않다 하셨지만 말씀을 듣고 있으니 과연 현자이십니다.” “그저 늙은 이 몸을 그렇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되려 감사합니다, 어르신.” 나그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게도 혹여 방향을 가리켜 주실 수 있으신지요.” “물론이지요. 허나 이미 제가 어느 방향을 가리킬지 아실 것 같기도 합니다.” 나그네는 노인의 손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과연 자신이 예상한 그리고 자신이 가려던 방향이었다. 노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나그네는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걸어 들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Bloody Ros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