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이야기]#7
냉정하게 말해서 선배는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은 아니었다. 선배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별다른 특징이 느껴지지 않았고, 선배가 그린 그림은 한 번 눈길을 주고는 다시 눈길이 가지 않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었다. 그런 선배가 어느 날 장미를 그려왔다. 그리고 선배가 그린 장미는 한 번 눈길을 주면 다시 눈길을 떼기 힘든 장미였다. 선배의 그림을 익히 봐왔던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선배의 그림은 물 빠진 듯 색채가 밋밋했다. 그렇다 보니 강렬한 인상은 주지 못하고 언제나 스윽 지나갈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선배가 그려온 빨간 장미는 믿기 힘들 만큼 강렬했다. 절대 바라지 않을 것처럼 진하고 새빨갰다.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선배의 그림을 진심으로 칭찬했다.
“선배. 나 그동안 말하진 못했지만 솔직히 선배 그림 특별히 눈여겨본 적은 없었거든요? 근데 이 장미는 달라요. 뭐예요? 어떻게 그린 거예요?”
선배는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창피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에 말이 없던 선배는 민망해지면 꼭 지금처럼 머리를 긁었다.
“글쎄. 그렇게 칭찬해주니까 엄청 민망하네.”
“아니. 진짜 진심이에요. 아. 근데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분명 평소 보던 장미랑 모양이 다른 것도 아니거든요? 특별히 이쁘게 생긴 장미도 아니고요. 근데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왜지? 도대체 뭐지?”
좀처럼 보기 힘든 진심 어린 칭찬에 선배는 다시 한번 머리를 긁적였다.
“어? 선배 손은 왜 그래요? 다쳤어요?”
선배의 왼손가락 끝에 밴드가 붙여있었다. 그러자 선배는 밴드가 붙여진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아. 이거. 글쎄. 저번에 프린트하다가 종이에 베였나 봐.”
“베였나 봐는 뭐예요. 다친 것도 기억 못 해요?”
선배는 멋쩍은 듯 웃기만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선배의 그림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난 장미 그림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지만, 조금 특이한 점은 모두 빨간색 물체를 그렸다는 점이었다. 선배의 달라진 그림에 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인사치레가 아닌 정말 깊이 매료되어 넋을 놓고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달라진 그림의 비결을 물었지만 선배는 여전히 웃으며 창피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하다못해 이제는 선배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빨간색 물감에 대해 물었지만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얼마가 흘렀을까. 선배의 그림은 여전히 매혹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선배는 점점 야위어갔다. 눈 밑은 퀭해지고 볼이 쏙 들어간 게 점차 살이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선배의 그림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배가 걱정되어 무슨 일 있는지 물었지만 선배는 그때마다 아무 일 없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었다. 그리고 이때쯤 되니 선배의 왼손은 이제 모든 손가락에 밴드 투성이었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선배의 그림이 매혹적일수록 선배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기어코 일이 터졌다. 선배가 입원했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선배는 병실 침대에 앉아 언제나처럼 민망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나는 안심이 되면서도 선배가 사라질까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는 나의 질문에 선배는 별 말이 없었다. 그저 별일 아니라고만 내게 말했다. 나는 속이 상해서 선배에게 더 따지려 해보았지만 야윈 선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선배의 손목에는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가 돌아왔다. 예전보다 혈색이 훨씬 좋아진 모습에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선배는 이전과는 다르게 좀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간혹 그림을 그려도 더 이상 빨간색이 들어간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선배의 그림은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더 이상 내가 마법에 빠진 듯 속절없이 매료되었던 그림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선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선배의 왼손에는 더 이상 밴드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