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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Aug 05. 2018

인연과 연인 사이(2)

[지나가는 이야기]#12-2

  다행히도 형석이가 소개해준 친구와는 말이 아주 잘 통했다. 다만 미리 알지 못하길 바랬는데 나현이와(형석이 친구) 대화해보니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물은 쏟아진 거 이것저것 확인 차 물어보았다. 그분이 남자 친구가 있는지. 몇 살이신지.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등등이었다. 나현이의 말에 따르면 유나(이름도 취향 저격이었다)는 현재 남자 친구가 없고, 나이는 자신과 같다고 했다. 사실 이런 일에 익숙지 않은 나로서는 나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극도로 창피하였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현이와 워낙 대화가 잘 통하였고 유나 씨에 대해서 세세히 모르는 것 없이 알고 있어 한편으로는 신나서 대화했다. 그러다 갑작스레 나현이가 제안했다.


〚오빠. 한 번 유나 만나보는 건 어때요?〛

〚실제로?〛

〚네. 실제로 보고 말이라도 해봐야죠.〛

〚와. 이렇게 갑자기? 난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에이. 언제 준비하게요. 쇠뿔도 단김에 빼야죠.〛

〚나야 진짜 고맙긴 한데. 괜찮을까?〛

〚괜찮다니까. 저만 믿어요.〛

〚그래. 진짜 고맙다. 너만 믿을게.〛

〚그럼 내일 모레 토요일 오후 1시 신촌 어때요?〛

〚헐. 그렇게 바로?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사실 이미 말해놨죠. 그럼 저 날 보기로 해요. 알았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 고맙다. 내가 꼭 잘 되서 한턱 쏠께!〛

〚당연하죠 ㅋㅋㅋ〛

〚야 얼굴 한 번 못 본 나를 이렇게 도와주다니 진짜 내가 이 은혜 잊지 않을게〛

〚저 고기 좋아해요 ㅋㅋㅋㅋㅋ〛

〚여튼 내일 모레 저도 나갈테니 그때 봐요!〛


  나는 주어진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너무 기분이 좋아 이게 꿈인지 생신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물론 꿈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약속을 확인하고 심호흡을 했다. 너무 일이 잘 풀려서 기분이 좋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실제로 만남이 이렇게 빠르게 이뤄질 줄 몰랐다. 솔직히 형석이한테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알고 지내게 되면 좋겠다는 정도의 마음이었지 실제 만남까지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일모레라고는 하지만 저녁인 지금 시각을 고려하면 채 하루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전날 저녁이 되자 설렘과 기대감이 대형 풍선마냥 부풀어 올랐고, 두려움 또한 그만큼 부풀어 두둥실 떠 있었다. 걱정이 된 나는 나현이에게 연락하여 조언을 구했지만, 나현이는 이렇다 할 조언 없이 그저 무조건 잘 될 거라는 이야기만을 남기고 일찍 잠들었다. 그래. 이 정도까지 떠먹여 주면 이제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하는 법이지. 마음을 다 잡고 내일 입을 옷을 미리 챙기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푹 잤을 리가 만무했다.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족히 새벽 3시까지는 긴장감에 밤을 지새웠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반쯤 넋이 나간채로 준비를 하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약속 장소가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와. 우황청심환이라도 먹을 걸 그랬나.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의 하도 쿵쾅거리니 발이 덩달아 놀란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마치 필터로 거르듯 그녀가 보였다. 유니폼을 입고 일하던 그녀의 모습은 자주 보았지만 사복을 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치마를 입은 모습을 본 것 역시 처음이었다. 무릎 위 짧은 까만 스커트에 베이지 색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위에는 귀여운 떡볶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용기인지 당황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이끌려 먼저 인사를 건넸다. 딴에는 태연한 척했지만 입에서 나온 소리는 이미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와 달리 그녀는 별로 긴장하지 않은 듯 보였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야기와 다르게 나현이는 보이지 않았다. 뭐지? 늦나?

  “저 혹시 나현이는?”

  “아. 나현이 오늘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못 나온다고 했어요.”

  “아!..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나는 이것이 말로만 듣던 주선자의 센스 있는 배려라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고맙고 은혜로운 나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나에게는 그 커다란 배려에 답할 의무가 있음을 깨닫고 미리 준비해둔 코스로 유나 씨와의 만남을 시작했다.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경주마처럼 빠르게 뛰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래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색해하지 않고 이미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편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상당히 놀랐다. 이 또한 나현이의 영향력이었을까? 내가 가끔 버벅거리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모든 것이 준비한 일정대로였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즐거운 시간이었다. 준비한 것은 모두 끝났지만 나는 그녀의 반응에 자신감을 얻어 집에 데려다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저녁 약속이 있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부푼 자신감은 급속도로 쪼그라들어 나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고맙게도 정말 즐거웠다고 말해주었고, 다음에 보자는 기색까지 내비쳤기에 나는 속없이 웃어 보이며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가고 행복에 취해있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지금의 행복을 마시게 해 준 나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여태 나현이와 톡으로만 연락을 하였기에 따로 연락처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바로 형석이에게 전화했다. 

  “어. 형.”

  “어. 형석아. 바쁘냐?”

  “아니. 형. 안 바빠. 근데 형 오늘 소개팅했다면서? 다 들었어.”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누가 말해줬냐?”

  “누가 말해줬겠어. 나현이밖에 더 있어? 이야. 봄날 오나보네. 우리 형.”

  “아. 맞아. 야 안 그래도 나현이한테 고맙다고 연락하려는데 내가 번호가 없어서. 나현이 번호 좀 알려주라.”

  “나현이 번호? 뭐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긴 한데. 형 지금 어딘데?”

  “나? 나 지금 신촌이지. 좀 전에 헤어졌거든.”

  “신촌이면 형 여기로 올래? 어차피 나 좀 있다가 나현이랑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그래? 잘 됐다. 나현이 얼굴도 못 보고 오늘 아쉬웠는데 기왕이면 고맙다는 말도 직접 하는 게 낫겠지. 어디로 가면 되냐?”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고맙던 인사를 건네고 싶었던 차에 직접 이야기할 기회까지 온 것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나현이와는 짧지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던 터라 만남이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오늘의 행운을 만들어 준 나현이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고민을 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재즈가 흐르는 아담한 펍이었다. 크게 시끄럽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약속 장소에는 형석이가 먼저 와있었다.

  “형. 여기.”

  “어. 나현이는? 아직 안 왔어?”

  “응. 뭐 조금 늦나 보지. 먼저 마시고 있자.”

  “그래. 야. 오늘 여기는 내가 쏜다. 오늘의 기적이 다 너희들 덕 아니겠냐.”

  “이야. 잘 된 거야? 진짜? 와.. 될 사람은 되는 건가?”

  “아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그냥 느낌이 좋아서. 너무 설레발인가..”

  “느낌 안 좋은 것보다야 백배 낫지. 미리 축하해. 형. 나현이 말로는 엄청 이쁘시다던데.”

  “내가 괜히 매일 찾아가는 게 아니다..”

  “아. 부럽다. 난 언제 연애해보나. 나현이 이건 지 동기는 안 챙기고. 생각해보니 기분 상하네.”

  “나현이한테 뭐라 하지 마라. 내게는 매우 감사한 분이시다.”

  “아~ 알았어. 형. 그래. 뭐 형 잘된다는데 내가 기분 상할 필요가 없지!”

  맥주잔 옆에 놓여있던 형석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현이었다. 나는 벌써부터 나현이에게 전할 고마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 어. 거기야. 형도 이미 와있지. 오케이. 알았다.”

  “어디래?”

  “거의 다 왔대. 이제 계단 내려올 거야.”

  한 번 더 맥주잔을 부딪쳤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형석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현이가 온 모양이었다.

  “어. 저기 오네. 여기! 야. 대박. 너 오늘 뭔 일 있었냐? 치마를 다 입고? 나 너 치마 입은 거 첨 봐! 와. 화장도 장난 아니네. 오늘 뭐 소개팅했어?”

  입구를 등지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기분 좋게 나현이를 보았다. 의자를 살짝 뒤로 젖혔던 나는 자칫 완전히 넘어질 뻔했다. 형석이가 바라본 곳에는 나현이가 아니라 유나 씨가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사고 회로가 멈춘 듯 그녀를 처음 봤을 때처럼 다시 한번 넋이 나갔다.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된 채 그녀가 내 맞은편 자리에 앉을 때까지 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자. 인사합시다. 실제로 서로 보는 건 처음이잖아? 이쪽이 형의 은인. 백나현. 그리고...”

  “유... 유나 씨?”

  “안녕하세요. 백나현입니다. 우리 구면이죠?”

  “응? 유나? 유나가 누구야. 뭐야. 둘이 본 적 있어? 언제? 처음 보는 거 아냐?”

  “아. 예. 아니. 응. 반.. 반가워.. 요. 유나 씨. 아니 나현아.”

  “뭔데. 뭔 소리야. 나도 알려줘. 왜 너가 유나야. 뭔데 지금 이 상황!?”

  나는 안간힘을 다해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가까스로 상황을 파악했을 때 난 유나 씨, 아니 나현이를 보며 벌써 누구라도 눈치챌 만큼 마음이 가득 든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나현이가 어떻게 유나 씨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그리고 유나 씨가 어떻게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둘 모두 나와 대화가 잘 통할 수 있었는지. 뿌연 안개가 걷히듯 진실을 깨달은 나는 눈앞에 놓인 행복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 나현이를 뚫어져라 바라봤고. 나현이는 그런 내가 재미있다는 듯 하얗고 경쾌한 미소로 나에게 화답했다. 비로소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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