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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Aug 09. 2018

비와 시문의 이야기

[지나가는 이야기]#13

  젠장 맞을 날씨라고 시문은 생각했다. 신발 앞코를 축축하게 적시는 비의 염치없는 친화성이 싫었고, 조금 더 조금 더 탐내다 결국은 양말까지 차갑게 닿는 끈질김이 싫었다. 게다가 우산이라니. 지갑도 들고 다니기 싫어하는 시문은 비의 협박에 가까운 무심한 강요가 싫었다. 그렇지만, 결국 한낱 인간이 하늘의 구멍을 메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문은 장마 때마다 투덜투덜 대며 우산을 들었고, 신발 앞코와 양말이 젖었다. 비는 시문을 배려하지도, 그와 타협할 생각도 없었다. 

  원룸 건물에 들어서면서 시문은 우산에 맺힌 별들을 털어냈다. 시문이 우산을 아래로 휘두르자 빗방울은 바닥에 부딪혀 은하수가 되었다. 시문은 105호 우편함이 머금은 종이들을 쥐고 집으로 들어갔다. 노랗고 기다란 공과금 용지들.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고시원보다 조금 큰 원룸에서 그런 비용이 나와 봐야 얼마나 나오겠냐만은 그런 작은 비용이라도 몇 개월 쌓이면 제법 부담스러운 금액이 되어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젠장, 집 안에 들어와도 비를 피할 수가 없구만. 시문은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 엽서가 하나 있었다. 외국 어딘가, 남미 쪽이 아닐까, 화창한 날씨의 푸른 바닷가 사진이 있는 엽서였다.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자세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그곳에서는 양말이 젖을 일도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엽서를 뒤집었다.      

요즘 날씨 너무 좋지 않아? 요즘은 이 엽서 사진만큼은 아니어도 진짜 길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니까. 피부는 좀 힘들겠지만, 뭐랄까 그 온몸으로 뜨거운 햇볕을 흡수하는 고양감이 너무 좋아. 그렇지 않아? :)     

  이게 다였다. 발신자와 발신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처음에 시문은 단순히 잘못 온 엽서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신지에 정확히 시문의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시문의 집 주소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도로명 주소가 아니라 지번 주소로 적혀 있었다. 또한, 수신자의 이름, 시문의 이름도 없었다. 시문은 잠시 기억의 캐비닛을 뒤져보았다. 나한테 엽서 보낼 사람이 있던가? 시문은 다시 엽서 내용을 천천히 보았다. 작고 귀여운 글씨체였다. 흐느적거리지도 않고 확신에 가득 찬 글씨. 여자가 쓴 거라고 시문은 확신했다. 그렇게 확신하니 더욱 엽서가 기이하게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시문에게 엽서를 보낼만한 여자는 없었다. 대인관계가 그리 활발하지 않은 시문의 휴대폰에는 여자의 연락처라면 손에 꼽았다. 엄마일 리는 없었다. 엄마는 이렇게 작은 글씨는 읽지도 못할뿐더러 쓸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이제 정말 엄마는 시문에게 엽서를 보낼 수 없었고, 그건 시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모로 고민해보아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시문은 정확히 배송되었지만, 잘못 도착한 엽서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자기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시문은 엽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꺼림칙했다. 그러나 분명히 시문의 집 주소가 적혀 있고, 반송할 주소도 없으니 어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시문은 컴퓨터 본체 위에 엽서를 올려놓았다.      

  손편지를 받아본 게 언제 적 일이던가? 시문은 누워서 정체불명의 엽서를 생각했다. 정말 언제였을까? 써본 건 아마 군대 때가 마지막이었을 거고, 그렇다면 받은 건? 역시 군인 때 전 여자친구가 써줬던 편지가 마지막이었던 거 같은데. 물론 그 둘이 묘하게 겹치는 건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남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전 여자친구를 욕한 적 없었지만, 가끔 울화가 치미는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시문은 조용히 읊조렸다. 쌍년.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다 지난 일이다. 지금도 수도 없이 벌어지는 일인데 뭐 별수롭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기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혹시 걔가? 잠깐 그렇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건 말이 안 됐다. 일단 그 후로 그 여자와 연락한 적도 없고, 지금 내 주소를 알리도 없었다. 수소문해서 어떻게든 알아낼 수도 있었을까? 아니, 그렇다 쳐도 무엇 때문에? 지난날의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뭐 그런 건가?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평생을 마음에 두고 살 사이도 아니었다. 실없는 상상에 시문은 웃음이 나왔다.

  다시 엽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더욱 이상했다. 아니, 오늘도 발밑 물웅덩이를 조심하며 걸었는데 화창한 햇빛이라니. 어디 뭐 다른 나라에서 보낸 엽서인가. 그래서 사진도 외국 사진이었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시문은 덮었던 이불을 헤치고 일어났다. 불을 켜고 엽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척 봐도 외국에서 보낸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서 보낸 엽서는 뭐 도장 같은 게 찍혀있지 않나? 그게 아니더라도 엽서 하단부에 희미하게 적힌 한글 안내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시문은 다시 불을 끄고 누웠다. 뭐, 저번 주에 보냈을 수도 있겠네. 저번 주는 날씨 좋긴 했었지. 어차피 잘못 온 엽서인데 알게 뭐야. 이불을 덮으며 시문은 생각했다.      


  여전히 우산 끝을 따라 별들의 궤적이 바닥에 찍혔다. 장마가 끝나가고 있었다. 시문은 우산을 털었다. 다른 손에는 편의점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속도 없이 매일 찾아오는 배고픔이 저주스러웠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돈이 들었다. 시문은 우편함을 들여다봤다. 원래 시문은 우편함을 자주 들여다보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에 한 번씩 들어오는 길에 우편함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권태로운 습관으로 바뀌는 즈음 새로운 엽서가 도착했다. 가장 먼저 시문이 놀란 것은 놀란 자신의 모습이었다. 순간 숨이 멈춘 시문이었다. 시문은 자신이 은연중에 생각보다 더 엽서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비 오는 날의 사진이었다. 일자로 뻗은 흙길 양옆으로 짙은 녹색의 잎사귀들이 아치형으로 이어져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 으레 그렇듯 녹음은 의심할 바 없이 진한 녹음 그 자체였다. 잎사귀 가장자리 곡선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얇은 빛기둥. 시문은 숨을 들이쉬지 않아도 폐를 채우는 초록 활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는 우산을 들고 숲 속을 걷는 이였다. 떨어지는 초록 별들.     

이렇게 비가 시원하게 내리는 날이면 옛날 일이 생각나. 한 번은 비가 세차게 내리기에 미친 척하고 우산을 버리고 투명 우비를 사서 입고 신나게 뛰었던 적이 있었거든. 빗속을 뛰어본 적 있어? 빗방울이 이마에 닿는 느낌이, 휘젓는 손가락에 부딪히는 느낌이, 그렇게나 시원한 줄 왜 까먹고 있었을까 싶더라고.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쳐다보긴 했는데, 알게 뭐람. 갑자기 그때가 생각났어. 곧 장마가 끝난다는데. 꼭 한 번은 우비 입고 뛰어 볼 거야. 혹시 길을 걷다가 우산을 쓴 사람들 사이로 우비를 입고 뛰는 사람을 본다면 어쩌면 그거 나일지도 몰라. 너무 이상하게 보지는 말아줘. ㅋㅋㅋㅋ     

  지난번과 같은 글씨체. 같은 분위기. 빗물에 조금 젖은 귀퉁이. 역시나 수신지만 적혀있는 엽서. 시문은 궁금했다. 도대체 두 번이나 의도적으로 이런 엽서를 보낸 사람이 누굴까? 그리고 왜? 알 수 없었다. 시문은 하나 더 궁금한 게 생겼다. 진짜 우비를 입고 빗속을 뛰는 기분이 어떤 거였지? 무슨 느낌일까? 설마 군대에서 판초 우의 입던 거랑 같진 않겠지? 아, 그건 너무 끔찍한데. 시문은 엽서를 컴퓨터 본체 위에 겹쳐 올려놓고, 도시락을 먹었다.

  그날 밤, 푸르스름한 달빛이 들어오는 어둠 속 침대에 누운 시문을 사로잡은 생각은 하나였다. 한 번 해볼까?     

  아스팔트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원한 빗소리가 집안을 연주했다. 시문이 찾아본 예보에 따르면 사실상 오늘로 장마는 끝이었다. 하루 이틀 정도 더 내리긴 하겠지만, 아주 적은 양이었다. 내일이면 비구름은 쥐어짤 만큼 쥐어짠 빨랫감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시문은 생각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비닐도 뜯지 않은 비닐 우비가 있었다.

  시문은 원룸 입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비닐을 뜯은 우비를 팔목에 걸친 채로. 입을까? 말까? 내적 고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문이었다. 집을 나서는 주민들이 멍하니 비를 바라보고 있는 시문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딱 3초 정도. 그러고는 곧 바쁜 일에 잊힐 터였지만, 여전히 비 내리는 창문 밖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나서 옆 동료에게 이야기할 거였다. 나. 아침에 이상한 사람 봤어. 무슨? 집 나오는데 우리 원룸 주민 남자 같긴 한데. 우비 같은 거 들고 멍하니 서 있더라. 우비? 응. 입진 않고 가만히 그러고 있더라고. 

  알람을 듣지 못해 급히 반차를 낸 다른 여자는 그날 출근하는 버스 창밖으로 다른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동료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 오늘 점심에 버스 타고 오는데 우비 입고 뛰는 남자 봤어. 우비 입고? 미친 사람 아냐? 몰라. 얼핏 봐서는 멀쩡해 보였는데. 멀쩡한 놈이 점심에 우비를 입고 뛰어다닌다고? 사람들 다 쳐다보더라. 나라도 쳐다봤겠다. 신기하잖아. 그치. 신기하지. 근데. 진짜 즐거워 보이더라. 그 사람? 응. 뭔가 엄청 신나게 뛰던데. 시원시원하게. 원래 미치면 그렇게 뛰지 않아? 아냐. 그냥 뭔가 엄청 즐거워 보였어. 힘차고 시원시원하게 뛰더라고. 별일이 다 있네. 그러게. 아. 오늘날인가 보다. 무슨 날? 로또 사는 날. 뭐래. 혹시 알아? 신이 미처 꿈속에서 못 보여준 계시 일지. 웃기네. 여자 둘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 여자가 본 사람이 시문이었을까? 그건 확실하지 않다. 물론 시문도 그날 결국에는 우비를 입고 뛰긴 했지만, 그날 우비를 입고 뛰어다닌 사람이 시문만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시문은 한참을 우비를 입고 돌아다녔다. 잠깐만, 느낌만 느껴보고 바로 와야지 생각했던 시문은 거의 두 시간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걷다가 나중에는 숨이 턱까지 찰 정도로 뛰어보기도 했다. 그녀(엽서를 보낸)가 말한 감각을 알 것 같았다. 갑갑하던 우산을 벗어나 우비는 시문에게 비 오는 날의 자유를 선사했다. 이마와 볼에 떨어지는 차가운 감각이 새로웠다. 코끝을 흐르는 빗방울이 상쾌했다. 손끝을 두드리는 별똥별이 경쾌했다. 그 모든 감각이 유쾌했다. 시문은 일 년에 한 번쯤은 장마도 나쁘지 않구나 생각했고, 집으로 돌아와 두 장의 엽서를 집어 책장에 세워놓았다. 화장실에는 우비가 걸려 있었다. 똑. 똑. 똑. 투명한 별을 떨어뜨리며.     

  시문은 매일 우편함을 확인했다. 그 후로 엽서는 딱 한 번 더 왔다. 예의 귀여운 글씨체와 아름다운 사진, 기분 좋은 친근함이 담긴 엽서였다. 그녀도 지난 장마 때 우비를 입고 뛰었을까? 분명 그랬겠지. 시문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녀가 우비를 입고 뛰는 모습을 상상했다. 엽서를 사는 그녀. 글씨를 쓰는 그녀. 우체통에 엽서를 넣는 그녀. 시문은 그제야 집 근처에 빨간 우체통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길을 가다 우체통이 보이면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그러다 간혹 우체통에 무언가 넣는 여자라도 보이면, 그녀일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맞건 아니건 그 모습을 본 것만으로 시문은 기분이 좋아졌다.


  파란 하늘에서 나뭇잎이 팔랑팔랑 흔들의자를 타고 내려왔다. 발밑에서는 바스락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단풍이었다. 시문은 가을이 왔음을 깨달았다. 떨어진 단풍잎을 하나 집어 들었다. 시문은 들고 다니는 수첩 사이에 단풍잎을 끼웠다, 그리고 주변 서점에 들렀다.

  그날 시문은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주소로 엽서를 한 통 보냈다. 엽서에는 받는 사람 주소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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