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4일 아홉 번째 일기
저녁 시간, 회의를 하던 도중 기다리던 알람이 울렸다. 작가 신청을 올린 건 1월 31일 점심이 되기 전이었고, 상경하던 KTX 안이었다. 하루, 길어도 이틀, 짧으면 당일에도 회신이 온다던데, 감감무소식인 메일함을 왔다 갔다 한 지 영업일 기준 만 48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알람과 메일로 결과가 나온다고 적혀있었으니,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면 당연히 메일이 올리가 없는데도 괜히 들여다 보기를 반복했다. 기나긴 연휴가 걸쳐있다 보니 밀린 신청서들을 검토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대하다 떨어질 바에는 차라리 조금 더 설레는 채로 남아있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2월 4일. 거의 오후 6시가 다 되어가던 시간이었기에 오늘도 아니겠거니 하며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으나, 연달아 두 번 울리며 잠금화면 하단을 채운 배너.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 문구 한 줄이 나의 진짜 새 해는 지금부터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성취, 바라던 그것이었다.
작가. 작품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어떠한 전문직처럼 공식적인 서류로 증명되지 않기에 가볍기도 무겁기도 한 이 명칭은 내게 언젠가의 꿈이기도 하다. 작품을 만들어 내면 모두가 작가인지,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은 작품인지, 누구나 될 수 있다지만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게 맞는지. 그런 고민을 하다 보면 사실은 이 모든 번뇌는 그저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일 뿐이라고. 딱 5년 전 이맘때쯤, 핸드폰 메모장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내게는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도 마음도 없었고, 많이 서툴고 도저히 보기 힘들더라도 어차피 나만 볼 글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글을 썼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비공개 상태의 빈 SNS 계정을 만들어 감정의 찌꺼기를 배설하기도 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땐 폐쇄된 메모장 속에서 스스로를 죽였다. 내가 토해 낸 글 속의 나는 죽었었고, 또 살았으며, 다시 쓰러지다, 어떻게든 일어나곤 했다. 5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변했을까? 여전히 나는 갇혀있는 채로 글을 쓴다. 하루는 희망을 노래하고 하루는 절망을 부르짖는다. 인생이 이런 건가 싶으면서도 삶이 이래야만 하느냐는 한탄을 한다. 그럼에도 묻는다면, 나는 변했다.
여전히 나는 무겁다. 흔한 말로는 우울하며, 다른 말로는 괜찮은 척한다. 그러나 나는 예전보다 가볍고, 좋은 말로는 편안하며, 바라는 말로는 나아지고 있다. 좋지 않은 일에 대해, 원하지 않던 결과에 대해 의연하게 대처하지는 못하더라도 서서히 흘려보내는 법을 익히고 있다. 조금 더 거창한 말로는 극복. 예전의 나였다면 주저앉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 돌리고, 한없이 부족한 나만을 질책하며 그저 하루가 끝나기를 바라면서 지냈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때보다 나를 조금 더 안다. 내가 어떤 상황을 가장 싫어하는지, 어느 정도의 불안과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이건 좀 확실하지 않지만), 어떻게 해야 나의 회복력이 올라가는지, 그럼에도 나를 일으키는 게 무엇인지.
’나만 볼 글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게 아니었다. 내가 곱씹을 글이기 때문에, 대체로 낮지만 가끔씩 높은 기분의 내가 종종 들어와 열람할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하나뿐인 독자를 위해, 그래서 더 소중한 한자를 써야만 했다. 내 시간이 슬프지만은 않았다고, 분명 그 긴 하루에 순간의 행복은 존재했을 거라고 얘기해 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 작은 소중함을 알아버린 나는, 모두가 그러하길 바란다. 고난과 역경을 거쳐 깨달은 바를,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을 사람들이 조금 덜 고단하게 알아차리기를 바란다.
작은 성취를 계기로, 으슬한 몸을 핑계로 삼아 오늘은 하루 공부를 쉬기로 했다! 책상 앞에 앉아 어떻게든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려고 했으나, 오늘은 몸이 벌써부터 피곤하다고 한다. 조금 식은 차를 다 마신 후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전기장판을 켜 놓은 뜨끈한 침대에 누울 예정이다. 영어 단어 공부를 조금 하다가, 남자친구와 전화를 하고 나서 아마 잠에 들 것이다. 신청서에 썼던 문구와 함께 오늘의 일기는 여기까지. 내일도 웃을 일이 하나쯤 생기기를.
‘감히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지친 일상에서 우리를 웃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