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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컷 사진

2025년 1월 28일 두 번째 일기

by 무무

브랜드마다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각각은 15초. 어찌 보면 넉넉한 8번의 기회. 4개의 선택. 2장의 인화지. 이제 유행이라기보다는 클래식이 되어버린 인화 사진은 만남을 마무리하기 꽤 괜찮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분명 지난주까지는 따뜻했다는데 말이지. 오랜만에 맡은 고향 공기는 상쾌했지만 차가웠다. 만만한 남쪽나라라는 생각에 겨울용이라기엔 애매한 청바지와 코트를 선택한 것이 나의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그럼에도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아무래도 거리가 거리인지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가방순이는 당연히 이 친구(사실 2살이 많다.)가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정도로 꽤나 신뢰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는 노인과 바다라고 불리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도시의 지하철에, 이리도 깊은 역사인데도 에스컬레이터가 없냐는 생각을 하며 지하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의 끝에는 친구가 서 있었고, 우리는 가볍게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했다. 둘 다 크게 애교 있는 스타일은 아닌지라. 가벼운 안부를 묻고 식사 겸 술도 좀 즐기러 바로 자리를 옮겼다.


시시콜콜한 얘기는 시간을 때우기 좋다. 말이 시시콜콜이지, 서로의 요즘부터 시작해서 시사와 인문을 두루 다루는 유익한 시간이다. 왜 이렇게 세상이 팍팍해졌냐는 고찰부터 시작해서, 정이 똑 떨어져 버린 직장에 대한 한탄. 부질없는 희망이라던가, 서로에게 미처 공유하지 못했던 재밌는 에피소드까지. 어렸을 때 만나 젊었다가,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정적이기도, 바뀌기도 하는 주제는 가끔 지겨울 때가 있지만 대체로 아직 흥미롭다.


가벼운 맥주를 하다가, 재미 삼아 사주를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설 전이라 그런가. 근처 후기가 많은 가게에 전화를 걸었지만 휴무라는 답변을 받았다. 별 수 있나. 걷기에는 날이 너무 매서워, 눈에 보이는 노래방에 들어가 한 시간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나왔다. 밤늦은 시간 불이 켜진 카페에 앉아 못다 한 수다를 좀 떨다, 슬 피로가 몰려올 때쯤 자리를 파했다.


‘사진이나 하나 찍을까.’


생각해 보니 우리가 꽤나 오래 알고 지냈으면서도(단 둘이 유럽까지 다녀온 사이), 벌써 유행한 지 몇 년이 지난 네 컷 사진은 찍은 적이 없더라. 대학가 주변엔 널린 게 네 컷 사진 관이라, 적당히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아무런 포즈도 생각하지 않고 냅다 결제부터 했는데,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무난한 브이. 무난한 하트. 고작 두 개를 찍고 나니 할 게 없어서 10초나 버렸다. 갑자기 웃긴 거나 하자며 사마귀 같은 날렵한 손끝을 보여주는 친구의 모습에, 오늘의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도 그다지 무난하지 않은 포징들을 했는데, 묘사하기 어려우니(구구절절해진다.) 넘어가자. 게다가 최종 선택한 4개는 비교적 정상적인 것들이었다.


말은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은 해결되는 게 아무것도 없음에도. 나의 고민의 지극히 일부만을 털어놨음에도.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해 주는 것만으로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오늘은 그랬다. 오랜만에 온 고향. 오랜만에 만난 친구. 오랜만에 만든 추억. 오랜만에 남긴 기록. 그렇게 큰 웃음도, 행복도 아니었지만. 아늑함을 가진 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이 감정은 사실 행복이라기보다는 안정에 가깝고, 오늘의 나는 양과 음이 명확한 것 보다는 이처럼 0에 수렴하는 마음이 좋았다.


오늘 찍은 네 컷 사진은 다시 올라가는 대로 앨범 속 한 자리를 내어주어야겠다. 적어도 한 가지의 웃음이 오늘도 존재했음에 감사하며, 내일도 웃을 일이 생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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