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9일 세 번째 일기
그다지, 아니 사실 아예 연관성이 없긴 한데 오늘의 웃음을 한 가지로 결정하기 어려웠다. 웃을 일이 여러 개 있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까치까치 설 날이다. 양력 기준의 2025년 1월엔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힘든 일이 너무 많았어서, 올해 시작은 구정으로 하기로 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길. 웃을 일이 많기를.
몇 년 전부터 우리 집은 제사가 없어졌다. 할머니께서는 강경 제사 유지파셨으나, 자식들이 다 나서 말리는데 어찌 하리. 친가에서는 아직 제사를 지내는지 모르겠는데, 부모님의 이혼 후(성인이 되고 한참 후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라고 생각했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지만) 명절엔 외가에만 가고, 아버지에겐 전화를 한다. 그렇게 복잡한 가정사는 아닌데 아무튼 그렇다.
그래서 보통 설의 스케줄은 다음과 같다. 일찍 일어나서 간단한 요기, 할아버지를 모신 절에 모여서 세배 겸 절 한 번 드리기, 할머니 댁으로 가서 세배와 덕담 및 용돈 타임, 적당한 식당에 가서 점심 먹기. 끝. 추석에도 세배 타임이 빠지는 거 빼고는 비슷하다. 거의 고정적인 명절 루틴인데, 상호 피곤하지 않고 모두가 무난히 만족할 수 있는 일정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첫 번째 웃음은 할머니 댁에서 적당한 식당으로 이동할 때 터졌다. 인원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차 두 대로 나뉘어 이동을 했는데, 우리 집과 이모네는 이모네 차를 타고 같이 움직였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해 둔 차를 빼기 위해 이모부가 먼저 내려가셨고, 남은 우리 집과 이모네 인원까지 나를 포함한 총 네 명은 잠시 후 이모부를 뒤따라 이동했다. 멀리 보이는 차가 회전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넷은 차를 돌려서 이쪽으로 오겠거니 하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출구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뒤에서 엄마와 이모가 이모부의 이름을 부르며(예를 들어, 이름이 김철수면 김철수 씨~ 김철수 씨~ 하면서) 뛰어 쫓았지만 차는 이미 지하 주차장을 벗어나는 오르막에 올랐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직진했다. 이모께서 급히 전화를 하셨는데 운전 중이라 받지를 않으셔서 결국 그냥 다시 걸어 올라와서 차를 탔다. 재미난 일이라기보다는 어이가 없는 웃음이긴 했는데, 손을 파닥거리며 열심히 불렀지만 전혀 눈치 못 챈 채로 쌩하니 가버린 차와 덩그러니 남은 네 사람이라니. 시트콤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말이다.
두 번째 웃음은 약간 영화의 쿠키 영상 같은 느낌인데, 명절 루틴 이후에 발생했다. 보통은 식사에서 끝나지만, 기분에 따라 볼링장, 보드게임 카페 등 소소한 유흥이 추가되기도 한다. 오늘은 칵테일 바였다. 집안의 유일했던 미성년자가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하여, 주차장에 덩그러니 남았던 인원 넷과 갓 성인이 된 사촌동생까지 다섯이서 방문한 것이다. 나도 갓 성인이 되었던 때, 홍대에서 12월 31일 밤 오들오들 떨다 1월 1일이 되자마자 했던 일이 칵테일 바에 가는 것이었는데, 입문용 술로는 칵테일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식사를 했던 해운대 쪽에는 일찍 여는 칵테일 바가 없어서, 모두 음주 예정인 우리 다섯(둘은 운전면허 보유자, 둘은 장롱 면허 보유자, 하나는 면허 보유 예정자다.) 은 지하철을 타고 광안리로 이동했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카페 느낌의 바에서, 각자 다른 맛의 칵테일을 시켜 먹으며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했다. 주로 술맛에 관한 얘기였는데, 좀 독특한 맛들이 있기는 했지만 다들 무난하니 먹을만했고, 첫 공식 음주를 한 주인공도 나름 만족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오래 마실 생각은 아니었어서 적당히 즐긴 후 차리는 파했다. 마지막으로 옆에 있는 인형 뽑기 가게를 갔다. 요즘 많은 ‘OO오락실’ 같은 이름의 가게였는데, 관광지라 그런가 내가 봤던 인형 뽑기 가게 중 손에 꼽게 컸다. 이제는 이미 다들 알다시피, 인형 뽑기 기계는 잘 끌려올라오는가 싶더라도, 위에서 툭 하고 놓아버리기 때문에 잡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정말 뽑고 싶으면 몇 만 원씩 날리기 십상이고, 예전엔 그렇게 해서라도 뽑았다. 지금은 너무 많이 해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 상태라, 그냥 적당히 했는데. 웬걸. 하나를 뽑았다.
오랜만에 뽑아서 그런가 인형이 툭 떨어질 때, 웃음이 터졌다. 즐거움보다는 기쁨이나 쾌감의 웃음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했는데, 줄줄이 실패했다. 오 천 원에 만족할 거 만원이 되어버렸지만 뭐 어떠한가. 즐겁지 않았는가. 뽑은 인형은 들고 귀경하기도 무겁고 해서 동생에게 주었다. 좋아하더라. 나도 좋았다.
잦으면 피곤하지만, 가끔 있으면 정말 좋은 게 가족 모임인 것 같다. 우리 집은 크게 잔소리를 하는 편이 아니다. 결혼 얘기가 나오긴 했는데, 나이가 들고 애인도 있으니 순수한 궁금증에서 하는 말 같은 느낌. 오히려 다들 서른은 넘어서하라는, 벌써 그걸 생각하냐는 분위기긴 하다. 또, 대화의 주제가 그렇게 심도 있는 편도 아니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각자의 이야기를 끌어오기보다는 그 순간의 이야기를 하거나, 즐거웠던 옛 얘기를 한다. 할머니가 하신 튀김이 맛있다거나, 과일이 달다거나, 어릴 때는 뭘 좋아했다거나 하는 그런 얘기.
오랜만에 긴 연휴라, 오랜만에 길게 고향에 내려왔다. 이래저래 힘든 요즈음, 힘들다는 얘기를 털어놓은 건 아니지만 사람과 공간이 주는 아늑함과 위로가 있다. 간접적으로 오는 평온함이 있다. 오늘도 웃었으니, 내일도 웃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