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ft. 서브컬처)

2025년 2월 2일 일곱 번째 일기

by 무무

뭔가 하나로 콕 꼽자기에는 어려웠다. 굉장히 극단적인 하루였다. 재미난 일도 많았는데, 뭔가 쌓여있던 감정들이 물 밀듯이 쏟아져서 기절할 뻔했다. 설이 지나고 거의 일주일 만에 남자친구를 만났다. 사실 요즘은 주 1회 데이트로 굳어지고 있어서 그렇게 오랜만은 또 아니긴 했다. 아무튼 만나니 좋았다. 오늘의 행선지는 홍대입구.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던 설 이후, 날씨가 꽤나 풀린 하루였다. 패딩을 입고 나가긴 했는데, 돌아다니기 썩 적당한 기온이라 좀 많이 걸었다. 오늘의 첫 여정은 우선 점심. 주말 데이트 패턴의 시작은 보통 점심이다. 만나서 밥을 먹지 않으면 점심을 거르는 나의 좋지 않은 습관 탓에 생긴 규칙이랄까.


한 시 사십 분에 영화를 예매해 두었는데 식당에 도착하니 거의 한 시가 다 되어있었다. 약간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 조금 놓칠 수도 있지 하며 편히 생각하려고 했다. 고기-칼국수-볶음밥으로 이어지는 코스라 오래 걸릴 거였기 때문에. 근데 둘 다 배고팠는지 30분 만에 음식이 삭제되었다. 식당과 영화관이 5분 거리라 심지어 도착해서 커피까지 사서 들어갔다. 극강의 효율로 시간을 쓴 쾌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평점은 낮았지만 이전 시리즈가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어 그냥 봤는데, 그렇게까지 평점이 낮을 영화인가 싶었다. 지루한 부분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오랜만에 시계도 확인하지 않고 쭈욱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원래는 영화 후 사격장, 그리고 인생 처음으로 강아지 카페를 가 보려고 했으나 날씨가 좋아서 일정을 바꾸었다. 사격장은 시간이 얼마 안 걸리니까 가고, 그 외는 그냥 좀 돌아다니기로 했다. 사격장도 ‘OO 사격장에 가야겠다!’ 하고 정해놓은 것도 아니어서, 그저 홍대-연남 일대를 거닐다가 눈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소총과 저격총이었던가? 겨냥이 그냥 바로 되어버려서 별로 어렵지 않았다. 10분 정도 했나, 괜찮기는 한데 오히려 너무 쉬워서 약간 식었다. 조금 더 해볼까 하다가 비슷할 것 같아서 그쯤 정리했다.


오늘의 가장 큰 웃음은 다음 행선지에서였다. 플스방에 가려다 1시간 대기에 포기하고, 경의선 쪽 거리로 이어지는 길에 있는 엄청 큰 쇼핑몰을 구경하기로 했다. 주 목적은 남자친구의 히트텍을 사기 위함이었는데, 정작 매장에서 이미 다 빠져버려 목적을 잃었다. 대신 다른 곳을 구경하기로 하고 한 층씩 둘렀다. 사실 홍대 쪽으로 오면 종종 들르는 곳이었는데, 한 번도 꼭대기 층까지는 가 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올라간 꼭대기 층에는 거대한, 애니메이션 매장이 있었다. 굿즈부터 카페, 식당, 서점까지. 그만큼 큰 애니메이션 전문 매장은 일본에서나 봤지 국내에서는 처음이었는데 은근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약간은 충격이었던 것이, 서점으로 가는 길목 좌측 벽이 온통 BL 소설 혹은 만화의 일러스트였다. 심지어 한 BL 작품을 배경으로 한 카페도 운영 중에 있었다. 서브컬처로 통용되는 애니메이션/만화를 좋아하여 나도 다채롭게 섭취하긴 하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 서브컬처 중에서도 음지로 분류되던 장르가 생각보다 아주 대중화된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별생각 없이 구경하는 나와 달리 몸서리치는 남자친구의 모습이 좀 웃겼다. 언젠가 미국 남자들은 늘 본인이 동성애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는 밈을 본 적이 있는데(남자친구는 한국 사람이지만), 남성성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거부감인가 싶기도 하고.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어 구경하는데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보다보니 점점 배가 고파져 저녁으로는 오뎅바에 갔다. 이쪽 동네에 오면 종종 오는 곳이다. 요즘 기분의 등락 좀 있었기도 하고, 뭔가 안 좋은 감정들을 애써 억누르며 지내고 있었는데. 조용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곳, 가벼운 술, 맛있는 안주, 내 얘기를 들어줄 것이라는 확인이 있는 사람. 몇 가지 박자가 다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한참을 인생 얘기를 했다. 노력, 가치, 변화, 권태, 미래, 과거. 산발적인 주제에 대한 두서없는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상담, 어떻게 보면 한탄인 얘기는 그렇게 재미없었을 텐데, 남자친구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내 얘기를 들었다. ’너를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걸, 그럼 더 예쁜 말을 많이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같은 말은 나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는 문구라서. 너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배가 차고 식당을 나서니 날이 꽤 매서워져 있었다. 다만, 우울한 상태로 집에 보낼 수 없다는 남자친구의 의견을 받아 주변을 조금 걷다가 어느 건물 2층에 있는 바에 들어갔다. 각자 하이볼을 한 잔 나누어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듣고, 나쵸를 조금 먹은 후에야 서로의 집으로 갔다. 한바탕 털어내고 나니 조금은 후련해진 나는 그저 고마울 뿐이다. 거친 파도가 치는 마음은 피곤하지만, 그와 달리 육체만큼은 평온한 공간에 앉아서 하루를 기록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가아끔 센스와 눈치가 없는가 싶다가도 놀라우리만치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그에게도. 웃음만이 있는 삶은 어차피 없으니까, 적당한 슬픔이라면 기꺼이 겪는 것도 건강한 하루를 만들어가는 길일 것이다. 그럼, 마지막 연휴의 밤, 내일 맞이할 일상에도 웃음이 하나쯤 곁들여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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