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진화의 상징으로 규정하다. 1.
돈을 무서워한 것이 확실했다. 되짚어 봤다. 왜 나는 돈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하지? 그냥 뭉뚱 하게 계획하고 대충 수습하면 시간은 흘러갔다. 모두가 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별로 관심을 주고 싶지 않았다. 돈에 대한 탐욕의 이미지는 강하게 내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다. 돈에 대해 공부하는 것도 흥미가 없었다. 아니 돈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순간 나의 영혼이 더럽혀질 것 같았다. 그저 그런 인간으로 전락할 것 같았다.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나는 돈의 물질적인 부분을 뛰어넘은 어떤 고귀함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나 자신을 강하게 규정했다. 하지만 내 속을 들여다보니 아니었다. 돈에 대한 더 깊숙한 곳의 나의 관념은 다른 것이었다. 두려움과 공포였던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게 된 것은 2가지의 사건 때문이었다. 하나는 경제적 어려움의 봉착하다 못해 끝단으로 치달은 상황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팀 페리스의 질문이었다. '당신에게 꼭 필요한 큰 변화를 위한 일을 행동에 옮길 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인가?' 나의 대답은 심플했다. '돈이 없어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희생하는 것.'와 생각하니 갑자기 아찔해졌다. 나는 그동안 상황을 회피만 했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서 든 의문. '왜 나는 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지?' 갑자기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지나 온 나날을 되짚어 봤다. 나 역시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나오는 돈을 경시하는 가정에서 자랐던 것이다.
어릴 때 나는 우리 집이 부자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살다오신 조부모님, 일본으로 사업 때문에 자주 출장 가시는 아빠 그리고 신앙심이 깊고 공부열이 높고 교양 있는 엄마. 아빠는 뉴욕에서 한 동안 살기도 했다.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그 시대 우리 집안은 다른 집안 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과 나는 버블시대 때 도쿄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그것은 학교의 또래의 다른 친구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은 잘 안되고 집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알고 보니 내가 태어날 때 사업은 이미 크게 한번 망했고 아빠는 뉴욕으로 도피한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돌보고 살기 위해 어린이집을 차려서 운영하였다. 결국 그게 아빠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 집의 주수입원이 되었다. 여유는 없지만 우리를 부족함 없이 키우려고 엄마는 부단하게 노력했다. 거기에 나는 기생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아빠는 계속 방황을 했고 엄마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그리고 열심히 성당을 다녔다. 엄마도 기댈 구석이 필요했던 것이다. 실질적인 가장은 엄마였기에 우리 가족 모두 성당을 다녔다. 엄마는 항상 교육을 강조했다.
성실하고 학구적인 사람. 엄마가 바라는 이상이었다. 나는 결국 명문대를 졸업했고, 해외 유학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나는 엄마의 가장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는 알게 되었다. 로버트 기요사키 책의 가난한 아빠가 추구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그 책에 쓰인 대로 나는 가난의 길을 제대로 밟고 온 것이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저축하는 삶- 나도 이렇게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예상되로 되는 않았다. 예술 전공의 나는 공부는 잘했으나, 유학 이후 진짜 돈을 벌어야 하는 시기에 미친 방황을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직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직을 숨 쉬듯이 했다. 엄마는 걱정이 많아졌다. 일정한 시간에 출근해서 남이 시키는 일을 해내고 돈을 받는 행위가 나에게는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하려고 노력했다. 남들도 하는데 내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정말 억지로 꾸역꾸역 참고 다녔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직장뿐만이 아니었다. 업의 종류도 계속 바꾸었다. 혼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나중에 사업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긴 했다. 힘들었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돈에 대한 나의 관점이 어떻다는 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엄마가 나에게 어릴 때부터 했던 말들을 되짚어 봤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된다.', '안정적인 회사를 들어가서 꾸준하고 성실하게 다녀야 해.', '사람이 너무 돈돈 거리면 없어 보여.' - 그 가난한 아빠가 이야기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소름이 돋았다. 아빠의 경우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어서 나에게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나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줬다.
부모님 모두 다 전쟁 직후 태어났다. 그 시대는 생존이 목적이지 돈에 대한 개념을 잡기에는 어려웠던 것은 분명했다. 아빠의 아버지, 친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운 좋게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했었다. 하지만 사치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하게 돈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말대로 구두쇠였다. 집안에서 돈에 대한 위기를 항상 염려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인색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반면 할머니는 일본에서 교육을 잘 받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신여성이었다. 둘은 결혼을 했고 아빠가 태어났다. 할머니의 유전자가 굉장히 세서 그런지 아빠는 할머니의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미남이고 풍족한 집에서 자란 아빠는 언제나 인기인이었다. 여유라는 것이 있었다. 이미 할아버지가 마련한 기반 위에서 쉽게 사업을 시작했다. 망해도 막아줄 할머니가 있었다. 아빠는 모든 것이 쉬웠다. 돈은 항상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신경 쓸 대상은 아니었다. 없어도 어디선가 생기는 것. 아빠에겐 돈이라는 것은 그런 존재였다. 그는 항상 낭만을 추구했다. 엄마는 엄격한 순수주의자였다. 젊은 시절 실제로 수녀님이 되려고 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근검절약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겼다. 그런 사람이 어쩌다 낭만주의자와 결혼을 해서 나를 낳았다. 아름다운 것을 다 받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돈으로 보는 세상을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들도 돈에 관련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깐. 자기들도 모르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그들이 생각하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세계에서 자라났다.
새벽 5시 언저리에 일어났다. 30분 정도만 더 자도 숙면한 기분이다. 4시 30분 2주 차인데 적응이 되어간다는 느낌이다. 가장 설레는 시간.
새벽 7시 독서 모임에 흔쾌히 신청해 주신 씨디님. 소중한 떡과 사과를 챙겨 오신. 아름답고 이상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실제 한다는 것을 언제나 보여주신다. 상쾌한 시간이었다.
진심으로 질문하고 작성해 보는 시간이었다. 점점 포커싱이 되고 있다.
뭔가 피가 도는 느낌이랄까. 재미있고 흥미롭다.
꿈에 그리던 일파정에서의 점심. 흑돼지 갈비탕.
아직 따뜻했던 햇빛. 소중하다.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재교육시키고 있다. 재미있고 흥분된다.
심플하게 산다에서 큰 영감을 받고 청소를 했다. 좀 피곤해서 작은 부분만 시도했는데 벌써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매일 계속 시도해야겠다.
씨디님이 준 직접 만든 영양 가래떡. 냉동실에 잘 저장했다. 떡국이나, 떡볶이 해야겠다.
아 이 다큐 시리즈 때문에 넷플 재결제할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나에게 큰 인사이트를 준다. 목마르다. 더 알고 싶다. 계속 생각난다. 나만의 새로운 드래곤볼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