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1에 쓴 글입니다.
이맘때였던 것 같다.
바람의 온도가 기억을 데려오는 건 새삼스럽지 않은 일.
데뷔 후 첨으로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크고 흰나비가 대구 - 영천 간 고속도로를 달리는 우리 가족의 차창 밖에 어림잡아 몇십 분가량을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갔던 그날의 기억.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할머니가 계신 곳이 범나비형 묏자리라고, 그래서 우리는 그 나비가 산소로 가는 우릴 마중 나온 할머니였다고 믿었고 두고두고 우리 가족에게 얘깃거리가 되었다.
동생이 태어난 후 엄마는 나를 잠시 시골 할머니 댁에 맡기셨다. 그때의 잔상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인지 아니면 엄마의 얘기를 듣고 사진으로 보고 상상한 건지 헷갈리지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개울가에서 흙과 검댕이 묻은 내 손과 얼굴을 닦아 씻기던 할머니의 거친 손바닥, 검정 고무줄로 한 줌 되는 내 머리를 묶다 한쪽 귀퉁이에서 겨우 성공하신 할아버지의 투박한 손, 조그만 손녀 하나 돌보는 것도 수월치 않으셨을 두 분의 검고 주름진 얼굴, 할머니가 맷돌을 돌리실 때마다 작은 구멍에다 콩을 넣어드렸던 내 작은 손, 하루 종일 볕이 내리쬐는 마당에서 정수리가 따가운 줄도 모르고 개미를 관찰하거나 풀꽃이나 흙을 가지고 혼자 놀며 새까맣게 탄 어린 나의 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할머니는 정이 참 많은 분이셨다. 우리가 방문할 때면 늘 버선발로 꽤 먼 대문까지 달려 나오셨는데, 아직도 그 표정, 목소리, 눈빛 모든 게 기억난다. 신발 따위 신을 겨를 없을 만큼 반가우셨던 걸까.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의 사랑하는 모습은 이토록 희생적이다.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다 팽개치고 달려갈 수 있는 것. 이런 사랑을 받으며 일 년간 시집살이를 했던 엄마는 여전히 할머니 얘기만 나오면 바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시고 만다. 며칠을 함께 보내고 우리가 떠나올 적에 보이시던 할머니의 얼굴과 꼭 닮은 얼굴이 되어서 말이다.
그렇게 정 많고 눈물도 많던 착한 우리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뭐가 뭔지 모르던 아이일 때, 분주하던 어른들 모르게 병풍 뒤로 들어가 누워 계셨던 할머니를 흔들어 깨우던 나. 이것은 상상이나 꿈이 아니라 명백한 기억이다. 그저 잠드신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보며 죽음이 무언지 깨닫지 못한 채로 울기도 했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도 했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다시 깨어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해 늦여름의 기억, 그 냄새와 감정은 어린 나에게 해석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 느낌이었다.
고등학생 때 가수로 데뷔하고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 생활을 하며 여러모로 고독하고 힘이 들던 시기, 오랜만에 추석 성묘 가는 길에 만난 그 흰나비. 내 오랜 팬들은 그 이야기가 3집 앨범 작업을 할 때 영감이 되어, 내 3집 수록곡 나비의 비행이란 곡으로 탄생되었단 것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그동안의 공연에서 이 곡을 부를 때 나는 할머니를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었다. 세월에 떠밀려 잊힌 다른 수많은 기억들처럼 말이다. ( 어린 시절 듣던 것처럼 삶은 막이 오르고 막이 내리 고의 연속, 결국 무대 뒤의 것들은 시나브로 잊히게 마련이니까. )
오늘 동네 산책을 하다 흰나비를 보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흰나비를 봐도 지나치며 걸음을 서둘렀을 뿐, 할머니를 떠올리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 할머니인가? '라는 생각에 이리저리 쫓아가보았다.
한참을 따라다니다 놓치고 난 아쉬움 사이로 나는 갑자기 먹먹해졌다.
사랑이 자리할 곳에 바쁨을 채워 넣고 영감이 자리할 곳에 의무가 자리했던 지난날을 이젠 좀 바꿔야겠다고.
하늘에 계실 할머니를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부지런히 그리워해야겠다고.
그때도 여지없이 버선발로 달려 나오시며 "아이고 ~ 진아! 왔나? " 하실 할머니가 눈에 선하다.
그러고 보니 추석이 가까웠구나.
역시 바람의 온도는 참 많은 기억을 데려온다 올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