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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Sep 19. 2020

우리가 불안을 견디는 법

김시연 작가 <노르스름한> & 한강 작가 <희랍어 시간>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v-AnMBE-NwE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들, 가치관, 취향 등으로 이루어져 있죠. 여러분의 세계는 얼마나 단단한 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저는 감정 기복도 크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쉽게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라서 제 세계도 꽤 단단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가 가슴 아픈 일을 겪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걸 보고 같이 마음 아파하면서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 세계는 결코 콘크리트만큼 단단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의 슬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에 더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일로 일상이 안정적인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경험하면 그제서야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연약하고 위태로운 것인지 깨닫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얼마 전 일우 스페이스에서 열린 전시 <작업의 온도>에서 본 김시연 작가의 '노르스름한' 연작이 떠올랐습니다. 사진 속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버터, 계란, 소금, 비누 같은 사물들이 테이블 모서리에 위태롭게 놓여있습니다. 버터는 온도가 조금만 올라가도 녹고, 계란은 조금만 힘을 가해도 깨지고, 소금과 비누는 물에 살짝만 닿아도 녹아버립니다. 작가가 다루는 사물들은 무르고 약합니다. 이러한 사물들이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 모습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불안정한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한강 작가의 소설 「희랍어 시간」에는 몸의 연약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우리가 사는 세계 또는 우리 인생의 연약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읽어 드릴 게요.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 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우리는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났다는 화자의 말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오래 기억에 남았는데요. 연약한 몸으로 위태로운 인생을 사는 우리가 불안을 견디는 방법은 서로를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는 것뿐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시연 작가의 사진과 한강 작가의 글이 우리의 세계를 더 강하게 만들거나 우리의 불안을 없앨 수는 없지만 우리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고민하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때로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작지 않은 위안을 받습니다. 영상을 보신 분들께 제 이야기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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