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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Dec 20. 2020

담배, 위스키, 남자친구, 집 중 하나를 포기해야한다면

영화 <소공녀> &서도호 작가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youtu.be/Bxfg2nVjT30​​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는 가사 도우미로 일하며 담배와 위스키를 즐깁니다. 그녀는 형편이 어려워 보일러도 틀지 못하고 추운 자취방에서 옷을 껴입고 겨울을 지내는데 해가 바뀌자 2500원이었던 담배는 4500원이 되고 집주인은 월세를 5만원 올리겠다고 합니다. 어디서 지출을 줄여야 할지 고민하던 미소는 월셋방을 정리하고 대학 시절 같이 밴드 활동을 했던 친구들을 찾아갑니다.


대기업에 취업한 친구는 그녀의 사정을 듣고는 아직도 담배를 피우냐며 그녀에게 바람이 든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본인이 예민해서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죠. 아들의 결혼을 간절히 바라는 부모를 둔 남자 선배는 부모님 소원도 들어드릴 겸 이왕 이렇게 된 거 자기랑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남자친구도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불편해하는 미소에게 계속 같은 얘길 반복합니다. 엄청 크고 넓은 집에 사는 친구는 미소를 얼마간 재워주지만 불안정한 부부 사이를 미소가 본의 아니게 건드리자 집도 없으면서 담배와 위스키를 끊지 않는 건 염치가 없는 거라고 본인 같으면 그것부터 끊었을 거라고 하며 미소를 내보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에게도 분명 결핍이나 결함이 있음에도 친구들은 단지 집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미소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미소는 그렇게 염치가 없거나 바람이 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가계부를 쓰고, 월셋방을 뺄 때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나오고, 담배를 필 땐 꼭 휴대용 재떨이를 사용하고, 친구들 집에서 지낼 때는 집안일을 하고, 대출 받아 방을 구하자는 남자친구에게 그건 싫다며 본인의 인생 목표는 빚 없이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죠.


친구들은 담배나 위스키가 미소에게는 사치라고 생각하지만 미소가 월셋방을 비우며 창고에 보관해두었던 오래된 악기들을 버리는 장면을 보거나 등록금이 비싸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녀가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담배와 위스키, 남자친구 한솔이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라 말하는, 한솔이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떠나면서 그마저도 잃게 되는 미소에게 우리가 바람 들었다고, 염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갈 데가 없어진 미소는 집을 구하러 다니지만 형편에 맞는 방을 구하지 못합니다. 영화는 강을 사이에 두고 고층 아파트 아래 덩그러니 놓여있는 텐트를 비추며 끝이 납니다. 미소는 자기는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을 하는 거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본인이 말한대로 그녀는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 없이 이동하는 삶을 살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런 미소에게 '집'이란 돌아갈 곳이 아니라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 되겠죠.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집을 소재로 한 설치 작품을 선보인 예술가가 있습니다. 해외에서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서도호 작가인데요. 그는 학업과 작품 활동을 위해 해외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살았던 집과 한국에서 살았던 한옥 집을 비교하며 '집'이란 공간에 대해 탐구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반투명한 얇은 천을 소재로 그동안 살았던 여러 집을 재현한 설치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저는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했을 당시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선보였던 작품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을 실제로 봤었는데요. 이 작품은 서도호 작가가 미국 유학 시절 거주했던 3층 주택을 실물 크기로 재현한 작품 안에 한국에서 가족들과 살았던 한옥집을 공중에 띄워 놓은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실제로 보면 아주 작은 부분까지 실제와 똑같게 재현한 섬세함과 미술관 내부를 가득 채운 엄청난 규모에 감탄하게 됩니다.


'집'이란 단어에는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집과 사람들이 집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나 감정이 함께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도호 작가의 작품은 '집'이란 단어에서 물리적인 집을 뺀 나머지, 즉 사람들이 집에 대해 가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을 시각화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주요 소재로 사용된 푸른 천이 매우 얇아 작품 전체가 반투명하고 한옥 집이 공중에 떠있어서 허상이나 환영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야할 것이 보이는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인데요.


집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나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거기엔 집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싶은 욕망이나 더 크고 비싼 집을 향한 환상 같은 것도 포함되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집'을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 아니라 재테크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떠올려보면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미소는 방 한 칸 없이 텐트에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집을 포기한 미소를 보며 용기를 얻거나 위안을 받았다는 리뷰를 꽤 많이 보았는데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살지 못하는 미소가 자신이 가진 몇 안되는 것들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너무 짠하게 느껴졌던 저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미소가 집을 포기하게 된 건 자발적이라기 보다는 경제적으로 정말 막다른 길에 몰려서인데 그런 상황이 오로지 그녀의 잘못인지, 거기에 국가나 사회의 책임은 없는 것인지 영화에서 묻지 않는 점도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구요.


'집'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어야 하고 누구나 최소한의 안정된 공간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집니다. 저는 미소가 담배, 위스키, 남자친구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많은 것들을 희망하기를, 텐트가 아닌 더 안전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잘 수 있기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기를,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는 더이상 돈을 벌 수 없는 나라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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