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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Dec 26. 2020

번짐, 번져야 살지 번져야 사랑이지

윤형근 화백 단색화 & 장석남 시인 <수묵정원 9 - 번짐>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youtu.be/mK67ppln3IA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오늘은 장석남 시인의  <수묵정원 9 - 번짐> 먼저 들려 드리겠습니다.

수묵정원 9 - 번짐 /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삶을  환히 밝힌다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번져서
 나비  마리 날아온다

시의 화자는 세상을 '수묵정원'이라 부르며 먹이 한지에 번져 나가는 현상을 은유적으로 사용해 계절의 순환, 사람 사이의 교감, 삶과 죽음의 섭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자에게 '번짐'이란 계절을 돌아오게 하고 타인과 교감할  있게 하고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저는 '번짐'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언가가 번져 있는 모습보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언가가 점차 번져 나가는 모습이 떠오르는데요. 무언가가 천천히 점점  넓은 범위로 번져 나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무언가가 번짐으로써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허물고 더이상 이쪽, 저쪽을 구분할  없는, 흐릿하고 모호한 경계선을 남기는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짐으로써 순환하거나 통하는 개념들, 시에 등장하는 봄과 여름, 꽃과 열매, 음악과 그림, 삶과 죽음도 그들 사이에 흐릿하고 모호한 경계선만 있을 뿐이어서 명확하게 둘로 나눌  없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 사이의 교감 또한 마찬가지여서   화자는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말하기도 했죠.

목련 꽃이 번져 여름이 되고, 음악이 번져 그림이 되듯이 장석남 시인의  시도 제게 번져  예술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바로 한국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 화백인데요. 지난 5 서울 삼청동의 PKM 갤러리에서 열린 회고전을 통해 처음으로 윤형근 화백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인기가 많고 호평이 자자한 전시였는데 전시를 보러 가기  스마트폰 화면으로  이미지를 가지고는  그렇게 반응이 좋은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구요. 하지만 이건 섣부른 생각이었고 갤러리에 가서 작품을 직접 보니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윤형근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있었습니다. 스마트폰 상의 작은 디지털 이미지로는 절대   없는, 원작을 실제로 보아야만   있고 느낄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더라구요.

윤형근 화백은 1928년에 태어나 한국전쟁 중에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숙명여고 미술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부정 입학 비리에 문제를 제기했다가 ‘반공법 위반이란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는  암울한 현대사 속에서 여러 고비를 넘긴 끝에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예술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화백은 청색과 갈색을 섞어 검정색에 가까운 청다색을 만들고 이를 오일에 섞어 , , 한지 등의 천연 소재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청색과 갈색의 비율에 따라 청다색은 조금씩 다른 색깔을 띠고 물감의 농도나 캔버스의 소재에 따라 캔버스에 물감이 번져 나간 모양도 전부 다릅니다. 여러 차례 물감을 덧칠해서 물감이 번진 가장자리가 서로 중첩되어 새로운 색과 형태를 만들고 중심부는 색이 더하고 더해져 칠흑 같은 어둠을 보는 것처럼 새카맣기도 합니다.

윤형근 화백의 작품은 물감이 캔버스 위에 쌓이지 않고 완전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칠흑 같은 어둠처럼 새카만 부분에서도 두께나 부피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깊이만 존재하는  같습니다. 물감을 쌓으면 쌓을수록 그림은 더욱 깊어진 점이 역설적인데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여러 고비를 겪고   그때 느낀 좌절과 분노 등의 감정을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의 그림으로 풀어낸 윤형근 화백의 인생과 조금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그림들은 대부분 사이즈가  커서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작은 부분들을 세심하게 들여다  때와 멀찍이 떨어져서 작품을  눈에 담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달랐습니다. 작품과의 거리에 따라 같은 작품도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 흥미로워서 계속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그림을 보게 되더라구요.

모든 예술 작품이 그렇지만 윤형근 화백의 그림은 특히나  원작을 보아야만  진가를 느낄  있는  같습니다. 물감이 번져 나간 자국을 쫓으며 물감이 번지는 동안 흘렀을 시간의 길이를 유추하고 칠흑 같은 어둠을 마주하며 거기에 담긴 감정이나 시간의 무게를 가늠하다 보면 주위는 고요해지고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윤형근 화백의 그림은 침묵과 고요를 선사합니다. 빈틈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그의 그림으로부터 선물 받은 침묵과 고요는 어쩌면 그림  자체보다도  소중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윤형근 화백의 그림을 사랑하는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석남 시인의 시와 윤형근 화백의 그림, 그리고 저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도 번질  있다면 좋겠습니다. 번져야 사랑이니까요.

영상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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