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 & 진은영 시인 <그런 날에는>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Z5MkAo4alPo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해도 짧아지고 미세먼지도 전에 비해 심해진 것 같고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 한 게 뭐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들고 평범한 일상은 언제야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요즘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한동안은 이런 기분이 계속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감정을 다룬 진은영 시인의 시가 있어서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분들께 이 시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날에는 / 진은영
산책을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가다가 만난 친구에게 다정하고 소소한 안부를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함께 걷다가 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리를 바꾸어
계속 가듯이 그렇게 날씨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왜 마음은 어린 날 좋아했던 음료수병 같지 않을까
아무리 아껴 마셔도 투명한 바닥을 드러내던 그거
마지막 한 방울의 아쉬운 미학을
내가 다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리 쏟아도 계속 흐르며 죽은 종이를, 칫솔들, 깨진 구들을
적시는 게, 갈비뼈 사이로 깨진 간장독처럼 줄줄 흐르는
그런 게 내 속에 있는 것일까
이사 트럭처럼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소중한 세간살이며 거기에 담겨온 기억을 내려놓고
잘 사세요 애인들이여
출발하는 매일의 노동을 나는 모르는 것일까
그런 날엔
네 잠의 허파 속을 가시복어들이 빠르게 헤엄치고 있다고
붉은 얼음 위에 너의 손목들이 길게 놓여 있다고
네가 있던 곳에서 고개를 슬쩍 돌리며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날엔 실례를 무릅쓰고
열다섯 살까지 엄마가 나에게 기워 입힌 아버지의 낡은 팬티나
그 떳떳한 바느질 솜씨에 대한 정신분석학이나,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을 노래한 시인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연대감, 그가 겸비한 용기와 솔직함에 골몰하느라
나는 솔직하지 않은 게 아니라 용기가 없는 거라고,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사실의 씨앗을 부드럽게 덮어 줄 유머가 없는 거라고,
나에겐 도망칠 수 없는 지리멸렬의 미학이 있을 뿐이라고
산책을 나갈 수 없는 것일까
불이 바뀌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행인들처럼
금세 건너지 못하고 길게
배를 깔고 누워, 흐릿해져가는 횡단보도처럼
경쾌한 차들이 휭휭 지나쳐가는 굉음의 무게를
모든 세포의 사슬들로 잡아끌면서, 울음도 아니고 웃음도 아니고 그저 무게일 뿐인,
질병도 못되고 회복도 못되고 모종의 이동일 뿐인,
어느 무념의 입술이 책 위의 먼지를 훅 불어버리듯
흩어지고 싶은, 그런 날
시 속 화자가 이야기하는 '그런 날'이란 산책을 할 수 없고 친구에게 안부도 물을 수 없는, '책 위의 먼지를 훅 불어버리듯 흩어지고 싶은' 날입니다. 화자는 무기력하고 공허하고 조금 슬프고 우울해 보입니다. 이런 감정은 '함께 걷다가 자리를 바꾸어 계속 가듯이' 바꿀 수 없고, '아무리 아껴 마셔도 바닥을 드러내던' 어린 시절 좋아하던 음료수 같지 않아서 아무리 쏟아도 계속 흘러나옵니다. 화자는 이런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본인과는 달리 '이집 저집 옮겨다니며 세간살이와 기억을 내려놓고'는 쿨하게 이별하는 이사짐 트럭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어릴 적 화자는 엄마가 기워준 아버지의 낡은 팬티를 입을 정도로 가난했기에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을 노래한 시인에게 연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본인은 그 시인처럼 가난했던 시절을 노래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데요. 그 이유는 화자가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우울한 감정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것이고 앞으로도 그 시절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자는 신호등이 바뀌면 길을 건너는 행인들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배를 깔고 누운 횡단보도처럼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울음도 아니고 웃음도 아니고 그저 무게일 뿐'이며 '질병도 못되고 회복도 못되고 모종의 이동일 뿐'이라고 본인의 심리 상태를 묘사한 부분에서 화자의 무기력과 공허함이 잘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명화 <절규(The Scream)>로 유명한 에드바르 뭉크도 시 속 화자처럼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에서 평생을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1863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뭉크는 5살이 되던 해 결핵으로 어머니를 잃고 몇 년 후 같은 병으로 누나마저 잃게 됩니다.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과 아버지의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인 양육 방식으로 인해 생긴 불안하고 우울한 정서는 평생 뭉크를 따라다녔고 그는 이에 대해 '태어날 때부터 내 곁에는 두려움, 슬픔, 죽음의 천사가 있었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이 홀로 슬픔이나 외로움, 절망감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진은영 시인의 시 속 화자가 '그런 날'에 느끼는 감정들이 떠오릅니다. 그들 역시 '갈비뼈 사이로 깨진 간장독처럼 줄줄 흐르는' 외롭고 불안하고 공허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뭉크의 그림이 전부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를 풍긴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해변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그리기도 하고, 소풍을 가는 듯한 아이들과 그 앞에 펼쳐진 자연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희망차고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듯 휘황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그리기도 했죠. 그런데 이렇게 밝은 색감으로 희망찬 소재를 다룬 작품들보다 제겐 이 작품이 더 감동적으로 느껴졌습니다. 1900-1905년 경에 그려진 <별빛 아래서(Under the Stars)>라는 작품인데요.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두 사람이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습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정면에 보이는 사람의 표정과 두 사람이 안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매달린 채 울고 있고 그 사람은 자신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사람을 달래며 위로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제가 울며 안겨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를 품에 안고 달래주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습니다.
만성적인 우울증과 환각 등으로 인해 평생 괴로웠던 뭉크에게도 이렇게 안겨 위로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었을까요? 뭉크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말년에는 세상과 등진 채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작품 활동에만 몰두했는데요. 제가 뭉크의 그림을 보며 위안을 얻었듯이 그림이든 사람이든 뭉크에게도 의지하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다른 이의 안부를 물을 수 없고 산책도 나갈 수 없고 먼지처럼 흩어지고 싶은, 그런 날이 있죠. 혹시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면 이번 영상이 아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