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satsu hot spring, Japan
나는 눈이 많이 오는 곳에서 자랐다. 반마다 비상연락망이란 게 있었는데, 소풍이나 운동회날 비가 와서 '우천시 취소'가 될때면 선생님이 몇 개의 조 첫 번째 집에 전화를 돌리고, 그 연락망대로 다음 집에 전화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처럼 단체문자나 메신저 단체창이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가끔 눈 얘기가 나오면 나의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이 신기하단 반응을 보인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학교를 안 간 적이 많았다고 하면, 대체 눈이 얼마나 오는지를 묻고. 자동차 타이어가 눈에 폭- 잠길 정도로 쌓인다고 하면 신기하다고 한다. 그리고 겨울에 일주일 정도는 학교 대신 샘밭 스케이트장에서 다같이 스케이트를 탔다고 하면 믿지 않는 눈치다.
춘천, 다섯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무려 15년이나 나는 그런 곳에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까지 지내고 있으며 한 두달에 한 번씩 춘천에 간다. 갈 때마다 느끼지만 그 곳은 많이도 변했다. 물론 지금은 눈이 그렇게 많이 오지도 않고, 가을마다 그득했던 무당벌레도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좋아하는 참새떼도 귀해졌다.
나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목욕탕도 찜질방도 온천도 즐기지 않는다. 엄마가 대중목욕탕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 접할 기회가 없었고, 대학생 때 친구들과 어쩌다 찜질방에 가도 샤워만 하고 나올 정도로 뜨거운 물을 즐기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온천을 즐겨 찾지 않지만, 한 번쯤 산 속의 노천탕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나는 퇴사 다음날 도쿄로 간 여행에서 1박 2일을 쿠사츠에서 머물렀다. 쿠사츠 온천(草津温泉)는 군마현 북서부에 있는 온천마을로 하코네 온천(箱根温泉)과 유후인 온천(由布院温泉)에 이어 손에 꼽히는 온천이다. 온천 특유의 향을 내뿜으며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삽화에서 본 듯한 분위기의 유바타케(湯畑)는 크고 신기하게 생겼다. 왕복 시간이 꽤 걸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을 찾았던 이유는 유바타케를 실제로 보고싶다는 것과 퀄리티 좋은 료칸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쿄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 조금 넘는 거리에 위치해 아침 일찍 나섰다.
쿠사츠 료칸은 H가 예약해주었고, 교통편도 척척 알아서 해주어서 매우 편했다. 혼자든 누군가와 한께든 여행계획은 내가 짜는게 익숙한데 가끔 이렇게 따라다녀도 좋겠다 싶은 순간. 버스에서 내리자 계란냄새 같은 특유의 향이 느껴졌다. 하늘이 굉장히 맑아서 도쿄보다 훨씬 낮은 기온에도 별로 춥지 않았다. 첫 인상이 좋으니 1박 2일 내내 좋을 것 같은 느낌.
사실 계란도 썩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큰 숨을 들이마시고는 윽-하는 느낌이었지만 금새 적응이 되었다. 자연을 있는대로 개조한 느낌이 아니라 잘 모셔두고 주변을 적당히 쌓아올린 느낌이라, 착한 동네구나 싶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오래 탄 탓인지 머리가 조금 아팠다. 동네 한 바퀴를 걷다가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갔다.
단정한 유바타케와 꽤 나이가 든 듯한 건물들, 그리고 그 뒤의 현대식 아파트도 모두 직사각형 투성이다. 나이 지긋한 노부부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일본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소위 말하는 성수기는 아니었기에 외국인은 많지 않아보였다. 정말 편안한 동네 분위기로 온천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따뜻함이 넘친다.
화산이 있고 지진이 잦은 일본은 이를 대비하여 건물을 짓고, 꼬꼬마 유치원생 때부터 대피 훈련을 받는다. 점점 나라 자체가 가라앉고 있기 때문에 많은 재력가들이 하와이에 땅을 샀다. 화산이 있기에 또 이런 멋진 온천이 있는 거겠지 싶다.
도착해서 유카타로 갈아입고 방에 있는 차를 한 잔 마신 후 저녁식사를 했다. 우리가 묵은 료칸은 첫 날 저녁과 둘째 날 아침식사가 매우 잘 나왔다. 더 가격이 착한 곳도 많았지만 식사가 좋다고 하는 곳으로 택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모든 것을 포함한 요금이 일인당 17,000엔 정도 했던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올라가니 정성스럽게 잠자리가 정돈 되어 있었다.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꽃담요도 모든 것이 잘 어우러지니 멋져 보였다. 밤 산책을 하고 돌아와 잠을 청하기로 했다.
딱히 기념품 샵 쇼핑은 안했지만 요거트를 한 병 사 마셨다. 신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우유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 맛이었다. 여행을 가면 무조건 유제품을 사 마신다. 예전에 호주에 있을 때 그 곳 우유는 얼마나 맛이 없는지, 2리터 짜리 우유를 초코맛으로 사서 마실 정도였다. 누군가 우리나라 우유가 진하고 고소하다는 말을 해 주었고, 어딜 가든 우유를 포함한 유제품을 맛보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치즈는 정말 맛있고 다양하며, 일본의 우유는 한국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으나 요거트와 밀크 푸딩은 정말 맛있다.
밤에 씻고 난 후 료칸 지하에 있는 온천물에 잠시 몸을 담궜더니 잠이 잘 왔다. 숙면을 취하고 아침식사를 먹으니 꿀맛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료칸을 나서는 길, 흰 머리가 멋진 노부부 사장님께서 배웅해 주셨다. 특히 할머니가 멋쟁이셨는데 일본 할머니들은 부분가발을 많이 착용하지만 자기 머리는 천연 백발이라며 자랑을 하셨다. 정말 그 백발이 멋지기도 했지만 예쁘다는 말에 미소짓는 할머니를 보니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났다. 다음에 또 갔을 때 이 할머니가 나를 맞이해 주셨으면 좋겠다.
노천탕 갔다오는 길에 간식거리를 사먹기로 하고 빠르게 산으로 향했다. 노천탕에 가까워 질수록 어떤 모습일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자연. 정말 자연이었다. 이 추운 겨울에 졸졸졸 소리를 내며 온천수가 흘러내리고 사람들은 그 소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간다. 그 모두가 여유롭고 편안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나도 그 중에 하나일 수 있음에 감사하는 순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족욕을 하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쉽다. 친구로 보이는 여자들 여럿이 꺄르르 거리며 발을 담그고 있었는데, 뒷모습 만으로도 행복함이 느껴졌다. 다음에 쿠사츠를 찾는다면 꼭 족욕을 해야겠다.
노천탕은 남탕과 여탕으로 나뉘어져 있다. 저렴한 입장료에 시설도 단촐했으나 추운 날씨에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기분이 정말 끝내줬다. 입김이 호-하고 나오는데 온몸이 따뜻한 느낌. 엄마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온 어린 아이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얌전했다. 물장구를 치거나 시끄럽게 하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 시간 정도 노천탕을 즐기고 가벼운 샤워를 하고 나오니 거짓말처럼 하나도 춥지 않았다.
추운 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체온이 올라갔는지 아이스크림을 먹고도 춥지 않았다. 친구는 새콤한 자몽맛을, 나는 고소한 흑임자맛을 골랐다. 비싸고 맛있는 식당에서의 식사도 좋고, 분위기 좋은 핫한 카페에서의 디저트도 좋지만, 그 나라의 동전을 짤랑하고 내고 사먹는 아이스크림이나 길거리 음식은 정말 맛있다. 그리고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마을로 다시 내려가 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가볍게 모밀로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아쉬운대로 온천수 족욕을 할 수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후, 다시 도쿄로 향했다.
곧 쿠사츠에 다녀온지 일 년이 된다. 올 겨울에는 또 어떤 기억에 남는 곳으로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