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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철현 Dec 26. 2023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민감도의 시대, 손님과 손놈의 구분법

시 한 편 소개하겠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이하 생략)

     

나는 고등학교 때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문제적 현실에 당당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평범하고 힘없는 대상에게만 감정의 화살을 쏘아대는 한 지식인의  신랄한 자기 반성문에 찡한 공감과 동정을 느꼈다. 찌질한데 멋있어! 


그런데 편의점 회사에 입사한 이후 나는 이 시를 바라보는 입장이 180도 달라졌다. 무릇 반성문이라 하면 잘못을 뉘우치고 향후 재발 방지를 위한 각오 한마디 정도는 있어야지. 아니, 반성문의 완성도를 논하기 전에 애초부터 저렇게 무례한 짓을 왜 하는 것인가? 자신이 받은 서비스의 퀄리티가 마음에 안 든다고 굳이 설렁탕집 주인을 ‘돼지 같다’ 비하하고 욕을 해야 직성이 풀릴 일인가? 정중하게 교환, 환불이나 개선을 요구하면 되는 일을, 본인도 옹졸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과한 화풀이를 하는 건 무슨 심보인가? 지성인의 고뇌랍시고 소설가와 월남파병 군인의 안위는 걱정하면서 설렁탕집 주인의 품위는 이렇게 상스럽게 짓밟다니 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이건 고객 클레임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이전에 우리가 보편타당하게 지켜 나가야 할 인권의 문제다. 소설가의 인권과 설렁탕집 주인의 인권, 그 외 모든 사람들의 인권은 등위에 있다. 거기에 일말의 부등호가 생기는 순간, 우리 사회에 갈등과 분열은 시작된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떼잉쯧! 사실, 시(詩)는 시이고 진상은 진상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김수영 시인은 그를 위한 신동엽 시인의 조사(弔辭)에서도 언급됐듯이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이었다.) 내가 굳이 1965년의 문학 작품에 대해 이렇게 장황한 꼬투리를 잡은 이유는 이런 사례들이 우리 주변에 특히, 편의점에서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기에 이 글이 바람개비가 되어 그에 대한 사회정서적 환기를 일으켰으면 하는 기앙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지방의 한 편의점에서 어느 부부가 빈병을 담아둔 박스에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알바생이 위험해 보이길래 거기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남자가 대뜸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면 안 된다'는 경고가 기분 나쁘게 들렸던 모양이다. 남자의 고성이 거세지자 두려움을 느낀 알바생은 옆에 있던 아내에게 남편을 좀 제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여자는 남편을 말리기는커녕 역으로 뭐가 불만이냐며 더욱 사납게 따지고 들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배운 게 없으니 이 짓거리나 하고 있지. CCTV 있지? 찍어서 보내. 나 벌금 낼 테니까. 경찰에 신고해!”

생각지도 못한 폭언에 화가 난 알바생이 사과를 요구하자 도리어 남자는 알바생을 밀치기까지 했고 그녀는 그대로 힘없이 나뒹굴었다.


공개된 영상을 보는데 내가 분해서 눈물이  돌았다. 부들부들.. 바닥에 쓰러지는 알바생을 보면서 마치 편의점 근무자들의 인권이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일하면 못 배웠다고 생각하는 저 무식한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이며 저런 몹쓸 인성과 교양을 가진 사람들이 대체 누가 누굴 보고 못 배웠다고 하는 건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정작 그들은 얼마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에  후안무치의 언행을 하고도 저렇게 뻔뻔하고 당당할까. 설령 그들이 명문대에서 학위를 받았다거나 높은 자리에 앉은 권력가, 수백억 대의 자산가라 할지라도 결코 다른 사람의 인격을 마음대로 재단하고 폄하할 자격은 없다. 벌금으로, 한낱 벌금 따위로 남의 인권을 짓밟은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생각이야말로 치졸함의 극치. 그들은 결국 경찰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진짜 그들의 말대로 됐다는 게 더 원통했다. 마음 같아서는 싱가포르처럼 우리나라도 태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촌극도 있었다. 서울 강남에 있는 한 편의점에 들어온 60대 남성이 담배를 사면서 20대 알바생에게 반말을 툭툭 던졌다. 그 말에 기분이 상한 알바생도 반말로 응수했다. 예상치 못한 작용 반작용에 당황한 이 남성은 “얻다 대고 반말이냐”며 노발대발했고 알바생은 “니가 먼저 반말했잖아”로 기름을 부었다.(인터넷에 돌아다니던 편의점 진상 대처법을 현실에서 써먹다니!) 그 뒤로 두 사람 간에 아주 많은 욕설들이 오고 갔다. 결국 이 싸움은 모욕 혐의로 서울중앙지법까지 가게 된다. 재판부는 형법상 모욕죄와 명예훼손죄는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될 수 있다는 공연성을 전제로 하는데 당시 편의점 내부에 손님 1명이 있었고 출입문 앞에서 어린이 2명이 내부를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알바생이 충분히 모욕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판단, 손님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런 걸로 법정까지 갈 일인가 싶지만 요즘 같은 민감도의 시대에 손님과 손놈의 경계를 구분 지어 보는 차원에서-물론, 법이 다가 아니지만-판결문을 곱씹어 볼 필요는 있다. 법원은 ‘피고인이 피해자로부터 존중받기 위해서는 피고인도 피해자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반말을 한다거나, 피고인의 반말에 피해자가 반말로 응대했다고 해서 피해자에게 폭언하는 것은 건전한 사회통념상 당연히 허용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이는 법률적 해석을 동반한 어려운 말이 아니라-아까 편의점 앞에 서 있던 어린이 2명(너희는 크면 그러지 말어~.)도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을!-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겠다.


편의점은 친근한 공간이다. 그렇다고 편의점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쉽고 가볍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모두 귀하고 빛나는 사람들이다. 최소한 내가 만난 편의점 사람들은 각자의 꿈을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멋진 사람들이었다. 평생 모은 목돈으로 편의점을 열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점주, 그런 부모를 도우려 자투리 시간을 쪼개 손을 보태는 자식들, 학원비를 벌기 위해 낮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고시 낭인, 아이들 키우며 생활비라도 벌어보려는 경력단절 주부, 좁은 취업문을 두드리며 꿈을 포기하지 않는 용돈벌이 청년들. 나이가 어리다고, 가방끈이 짧다고, 가진 게 없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하대해도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나를 포개어 남들을 바라봐야 한다. 모든 이들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감정과 인권과 가치가 있다.


한편, 누군가는 편의점 근무자들의 태업과 불친절에도 참아야 하는 건 부당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럴리가. 내 돈을 지불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받는 것은 소비자의 권리이며 상식 밖의 대우를 받으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그 과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 있으면 그리 해야 한다. 하지만 방식과 절차가 중요하다. 폭언과 폭행은 진흙탕 싸움만 될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성을 높여 봐야 기분만 엉망진창, 체면은 구겨지고 일은 더 복잡해진다. 개인적으로 이런 갈등에서 진심 어린 사과를 받는다거나 상호 본인들의 뜻대로 원만히 마무리되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현실적인 조언을 하나 하자면, 편의점 회사들은 CCM(고객중심경영)이 잘 갖춰져 있다. 그러니 불만, 불편이 생기면 괜한 힘 빼지 말고 고객센터로 전화하는 편이 여러모로 현명하다. 화는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지저분한 사람을 만났다고 나까지 지저분 해지면 안되니까.


이런 다툼과 분란이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편의점은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 꽃이 많이 피는 곳이다. 금아 피천득 선생은 <신춘(新春)>이라는 글에서 ‘신문 3면에 무서운 사건들이 실린다 하여 나는 너무 상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건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소설감이 되고 기사거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더 많다’라고 했다. 세상의 무례함을 만날 때 작은 위안을 얻는 글이다. 세상에 옹졸한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밝고 선한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도 여전히 세상을 따듯이, 꿋꿋이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어느 날 편의점을 나오면서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의 나머지 구절을 마저 읊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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