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사랑은 일방통행이었다.
첫 손녀인 나를, 할머니는 정말 아꼈다. 내가 어렸을 당시 세상은 아들을 참 좋아했지만, 우리 할머니는 내가 나라는 이유로 사랑했다. 같이 밥을 먹으면 누가 자기 밥을 뺏어 먹을까 밥그릇을 꼭 쥐면서, 또 할머니 밥을 먹고 싶어서 계속 쳐다봤다는 참 욕심 많은 이야기도 할머니는 내 어릴 적이 참 사랑스러웠다고 말하기 위해 꺼내곤 했다. 저 계단 앞에서 걷는 모습이 참 귀여웠고, 동네를 거닐면 할머니들이 누구네 자식이냐며 참 귀여워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 모든 이야기에는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의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할머니와 지낸 어릴 적은 기억 나지 않는다. 그곳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어린 손녀와 할머니의 추억은 할머니만의 것이었다. 그 순간의 사랑과 기쁨은 할머니만의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어린 손녀는 어떤 추억도 기억하지 못했다. 할머니, 나의 할머니, 하지만 너무 먼 할머니. 어린 나는 참 내향적이었고, 세상의 모든 예측 불가한 자극에 예민했다. 갑자기 내 무릎을 덮는 할머니의 손바닥, 턱 하고 내 등을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길, 두 사람 거리 정도 떨어져 앉아 있다가 갑자기 바닥을 짚으며 몸을 끌어 내 옆으로 다가오는 할머니. 그 눈빛, 웃음, 사랑으로 가득했던 표정. 익숙하지만서도 낯선 그 모든 것. 이제서야 인정한다. 나는 할머니가 부담스러웠다.
할머니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수십 년 전의 고생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좋은 것으로 삶을 채우는 대신, 고난과 슬픔의 기억에서 소리 지르는 것을 선택했다. 할머니는 우리가 놀러 가면 매일 우는 소리를 냈다. 우리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해서. 하지만 그 소리에 지친 자식들은 더욱 빨리 돌아가고 싶어 했다. 계속 위로해 주면 할머니는 계속 우는 소리를 냈으므로 부드럽게 달래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 할머니가 우리를 잡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건 아마 소홀해진 자식들에게 나를 위로해달라는, 이 기억을 덮을 만큼의 행복을 달라는 할머니의 외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식들이 줄 수 있는 행복과 할머니가 원하는 행복은 달랐다. 그것이 양이든, 종류든, 방식이든. 맞을 듯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외로웠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아주 예전에 돌아가셨으므로, 할머니가 평소에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외출뿐이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집에서 넘어져 뼈가 부러진 이후로 그 방법은 사라졌다. 이제 할머니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누군가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건강은 순식간에 나빠졌다. 사실 할머니는 혼자 움직일 수 있었다. 움직이면서 재활해야했지만, 할머니의 마음속에는 다시 움직이고 싶다는 기대보다 다시 넘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주중에는 사회복지사가, 주말에는 자식들이 할머니를 보살피기를 몇 년, 방법에 한계를 느낀 자식들은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보내기로 했다. 많은 어르신이 그러듯이, 할머니도 처음에 참 싫어했다. 이후로는 글쎄, 할머니가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잘 드시고, 다시 건강해지셨지만, 그것이 좋아했다는 뜻은 아니니까. 싫다고 하시진 않았지만, 좋다고 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병문안을 갈 때마다 할머니 표정은 좋았다. 당연하게도, 할머니는 외로웠으니까.
그리고 몇 년,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로 했다. 사실 그쯤 할머니는 많이 쇠약해지셨다. 나이 때문이었다. 1년 안에 돌아가실지도 몰라, 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할머니는 쇠약해지셨다가도 다시 회복하셨고, 그런 나날이 반복됐었다. 할머니는 오래 사실 거야. 체력은 왔다 갔다 하시지만, 기억력도 좋으시고 식사도 잘하시고. 1년을 미루면 나이 제한으로 떠날 수 없었으므로 나는 떠났다.
호주에 온 지 세 달도 되지 않아서 할머니는 떠났다. 엄마가 전화했다. 할머니 새벽에 돌아가셨어. 올 수 있니? 급하게 알아본 가장 빠른 비행기는 저녁에 출발해 다음 날 오후에 한국에 도착하는 비행기였고, 내 계획대로라면 나는 발인이 끝나고 바로 돌아와야 했다. 비행깃값은 300만 원이 훌쩍 넘었다. 아빠와 고모는 오지 말라고 했다.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오며, 자식들 손자들 다 있으니 나 없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죄책감을 덜어냈다. 그날 종일 사람들과 어울리고, 밤새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는 울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린 답은 ‘아마도 아니’였다. 심지어 너무 아무렇지 않다면 어떡하지, 라는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엄마의 전화를 받은 후로 가족들과 통화하며 나는 계속 울었다. 우는구나.
할머니와 나 사이에 난 사랑의 도로는 계속 일방통행이었다. 나와 할머니가 세상에 함께 존재하는 동안은. 지금은 양방향이니?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아니, 라고 답해야 할 것 같다. 그를 떠올리면 그립지만, 이 마음은 사랑보다는 연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안함. 할머니가 나를 바라봤던 눈빛으로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미안함. 이 마음도 사랑이라면, 어쩌면 이제서야 양방향일 수도 있지만, 할머니의 마음을 이제는 알 수 없으므로 결국은 방향이 뒤집힌 일방향인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내가 주었던 사랑도 있었기를 깊이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