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날도 지나고 나면 기억속 수많은 날 중 하루임을.
보나마나 내일을 시작으로 예비 소집일 그리고 수능 당일엔 어줍잖은 조언 한답시고 다들 한마디씩 거들텐데,
응 하지마세요.
그냥 오래 전 있었던 수능 때 이야기나 기록삼아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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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절대로 엄마 울게 하는 일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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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좁은 현관 앞에서 어머니를 꼭 끌어안고 주먹을 불끈 쥐고 현관을 나섰다. 부끄럽지만 아직까지도 살면서 가장 치열했던 1년으로 기억되던 수험생활을 끝으로 내 삶에서 가장 거대한 전쟁을 시작하는 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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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그마한 차를 함께 타고 고사장으로 나섰다.
으레 고사장 가는 길이 밀리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찍 나섰기에 늦을까 하는 걱정은 안했다. 다소 길이 밀리긴 했지만 제법 여유있게 고사장 앞에 들어섰다. 매년 펼쳐지는 풍경이지만 고사장과 가까워질수록 인파가 몰리기 때문에 차량으로 올라가기는 어려웠다. 언덕배기에 있는 고사장 아래에서 아버지의 차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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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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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한마디로 나를 격려해 주셨다. 이제는 그때보다 조금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지만, 여전히 술이 섞이지 않은 상태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내 시대를 살아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지만 묵직한 한마디에. '잘 보고 올게요' 라고 이야기 하며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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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한파' 라는 말은 나 이전에도 있었지만, 올해는 그렇게 춥지 않은듯 하다. 추위를 잘 안 타기 때문일까. 긴장이 추위를 느끼는 내 마음을 얼어붙게 한걸까. 입김이 나오는 걸 보면 딱히 기온이 온화한 날은 아닌 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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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올라가느라 다소 가쁜 숨을 내쉬며 올라가고 있다. 저 멀리에선가 소리가 들려온다
"둥둥둥... 쾡쾡"
가까워질 수록 커지고 또렷해 지는 소리. 고사장 정문 앞을 보니 역시나 후배들이 응원하러 나와있다.
반쯤은 재미 삼아, 반쯤은 내년은 자신들의 차례라는 생각으로 서로에게 책임감을 대물림 하고 있겠지. 이름 모를 나같은 선배들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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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많이 도와 주셨던 담임 선생님과 학생 주임 선생님이 계신다.
따뜻한 믹스 커피를 종이컵에 건네 주시며 "재성아 잘봐라" 라고 말씀하셨다
뭔가 뭉클하다. 하지만 지금 눈시울이 붉어지면 감정이 흐트러질 것 같아 입술을 굳게 다문다
"네. 꼭 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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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장 교실로 들어와 보니 내 자리는 한 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아뿔싸. 문제였다. 난로가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당연히 천장에서 온풍을 뿌려주는 온풍기가 당연하겠지만 나 때만 해도 석유난로나 더 열악한 곳은 석탄 난로를 쓰는 곳이 있었다. 지금 친구들하고 세대 차이가 안 난다고 애써 부정하며 사는데 이런 사실 앞에서는 어쩔수가 없다. 하긴, 나는 거의 10대 가까운 휴대폰을 바꾸고 나서야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던 사람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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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이렇게 가까운 거리면 시험을 보다 꾸벅꾸벅 졸거라는 사실이 자명했다. 그렇다고 자리를 바꿀수도 없는 일. 나는 미안한 마음을 무릅쓰고 난로를 껐다. 그랬다 쉬는시간이 되면 켜 놓기를 반복했다. 수험날에 불쏘시개 당번까지 도맡아 했지만, 시험을 보다 조는 것보단 그게 나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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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아 짐을 정리하고, 첫번째 언어 영역을 보려고 단어 장을 외우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는데
아까 내가 들어오던 때부터 이상 야릇한 웃음을 짓던 녀석이 내 옆에 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 였는데, 당시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터라 시 외곽에 있는 학교는 시내에 있는 학교보다 성적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입학했다. 당시만 해도 수능날 답안을 보여달라는 협박으로 수능을 제대로 못 보는 일이 있을 만큼, 학교에서는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고사장으로 가기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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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친구의 눈에는 사복을 입었으면 적어도 자신보다는 공부를 잘 하는 존재로 내가 보였나보다.
나는 나름 호흡을 가다듬으며 단어장을 외우고 있는데 갑자기 나한테 슬쩍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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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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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에 반응하면 보나마나 무슨 말이 오고갈지 뻔했다. 나는 애써 못들은 척 단어장을 계속 쳐다 보았다. 이런 녀석하고 싸워서 득 될것도 없고 되려 컨디션만 망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녀석과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기에 내가 거기서 싸움을 벌여서 간단히 제압하리라는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잠시 뒤 그 녀석은 또 나를 부른다. 이번엔 다소 목소리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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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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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도 무시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무시해야 맞다. 시험 시작 시간이 얼마 안남았다. 그렇게 몇분여를 버티다 보니 감독관들이 들어온다. 다급해진 그 녀석 나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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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야야 야야야야야야!!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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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 나는 그 녀석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언어 영역 시험을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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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큰 징크스가 있었다. 첫 번째는, 언어 영역과 수리 영역을 모두 잘 보면 그 시험 전체를 매우 잘보고, 언어와 수리 중 하나를 망치면 전체 시험이 망하는 징크스였다. 또한, 수리 영역을 풀 때는 빠르게 풀면서 넘어가는데, 그렇게 한 번 훑어보았을 때 30문제 중 25문제 이상 답이라도 냈으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형편 없는 점수를 받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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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에도 말하겠지만 그 때의 수능은 2001년 911 테러가 터진것에 빗대 '수능 테러'라는 말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게 어려운건지 내가 몰라서 못푼건지 시험을 보는 동안은 감이 오지 않는다. 매일 같은반 친구들과 이야기 하면 전반적으로 어려운건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지만 현재는 고사장. 친구들은 그 교실에 2-3명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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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보았던 시험보다 한참 못 본거 같은 느낌을 받은 나는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렇게 최선을 다 했는데.. 결국 꿈으로 끝나는건가.. 이게 내 한계인가.. 싶어 절망적인 생각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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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가 끝나고 그 녀석이 나한테 온다. 직접 온 뒤에 또 부른다
"야!!"
그런데 나도 이젠 시험 시작 전처럼 긴장할 상태가 아니었다. 시험이 망했다고 생각했으니 거의 이판사판 심정이었다.
"아 왜!!!!!!" 라고 되려 윽박지르자 그 녀석은 갑자기 쭈뼛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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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야!! 좀 답...답좀 크게 써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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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보고 싶으면 니가 알아서 재주껏 봐. 그리고 다시 방해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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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소한(?) 실랑이가 끝나고 수리 영역을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나는 내가 30문제 중 25문제 이상을 처음에 답을 내면 거의 만점을 받았다.
그런데 이를 어떡하나.. 한번 다 훑고 나서 푼 문제를 세어보니 고작 20문제 밖에 되지 않는다.
침착하며 일단 20문제에 대해 검산을 확실히 해서 답이라는 확신을 짓고 나머지 열문제만 남은 시간에 새로 푼다고 생각하고 다시 풀었다. 시간은 흐르고, 끝내 전혀 풀지 못하고 찍은 문제까지 생겼다. 2-3문제. 평소 고득점이 나올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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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학 시험이 끝나고 나는 분노와 절망이 동시에 치밀었다.
그런데 그 눈치 없는 녀석, 또 내 옆으로 와서 징징대려고 한다. 그도 당연한게, 나는 평소 시험을 보고 가채점을 위한 답을 적을 때 정말 작게. 굳이 pc 폰트로 따지면 5point 수준으로 작게 적어놓기 때문이다. 옆에서 볼 수가 없는 수준. 그러니 아까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내게 얼마나 스스로 짜증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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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또 다가오는 그녀석과 상관 없이 나는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시험을 잘 보지 못한 것에 분노해 있었다.
세게 두 손으로 책상을 내려 쳤다. 거친 욕설과 함께.
"아이 XX!!!!"
움찔........... 그 녀석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3교시를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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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2교시에서 생각보다 잘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 나는, 그래도 그래도 끝까지 봐야 한다며
나를 믿어준 분들을 위해 이제서라도 최선을 다 해 만회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느정도 안정을 찾고 문제를 풀어 나갔다. 체감상으로는 언어와 수리에 비해 탐구(사회/과학)영역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실수 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문제를 풀었다. 그렇게 3교시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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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은 체념, 반은 남은 영어라도 잘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었다.
하... 그런데 또 온다. 이녀석. 진짜 끈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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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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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왜!! 뭐!! 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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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쫌만 좀 크게 써줘 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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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알아서 보라고 했잖아!!!!!! 알았어!! 내가 이번엔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쓸테니 니가 알아서 보든가 말든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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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 녀석 참 순진했다. 그리고 그녀석도 내 답안을 잘 배꼈으면 생각보다 성적이 좀 오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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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시험을 보았다. 평소보다는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언어와 수학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영역에서 잘 보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 원치 않는 성적이 나왔던 과거의 추세를 생각했을 때 이번 시험을 잘 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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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의 고생했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새벽 두시에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 그믐달을 보며. '전국 고3 중 이 달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라고 호기롭게 웃던 모습, 여름 방학 급상승한 성적으로 전교 선생님의 주목을 받았던 일,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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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친구들과 함께 했던 맹세, 꼭 이루자고 약속했던 것들. 평생 가장 간절했던 1년의 시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고 당당히 말해도 아깝지 않은 나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내 옆에선 나에게 계속 답을 보여달라고 했던 녀석이 '아이 X발 망했어..'라는 말을 하고 있던게 왜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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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 거리며 아침에 쌕쌕 대며 오른 이제는 한산해진 그 언덕을 내려왔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고 올라 멍하니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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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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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는 아무도 없다. 당시 잠깐 일을 보시던 어머니, 대학생이던 누나, 일 하시는 아버지. 당연히 집에 5시에 머무는 사람은 없었다. 홀린듯 내 방으로 가 컴퓨터를 켠다. 비록 지금은 모두 날아가 버렸지만, 고 3 내내 이 컴퓨터로 대학 생활과 좋은 성적을 올리겠다는 다짐을 써내려갔다. 논술을 준비한다는 핑계였지만 그 일기가 나에게는 커다란 자산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처럼 클라우드라도 있어서 백업이 되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이제는 나에게 느낌만 남아있는 고 3 가장 치열했던 나날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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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점을 해본다. 가채점에서 한번도 점수가 어긋난 적이 없었기에 이 점수가 내 점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언어.. 생각만큼 못 보진 않았다.
수리.. 예상대로 잘 보지 못했다.
사회탐구. 이과인 내가 이걸 왜 이렇게 잘본거냐 쓸데없이
과학탐구. 이걸 잘 봤어야 했는데..
영어. 평소보다 못봤구나.
전반적으로 평소 수준으로 나온 과목이 언어와 사회탐구였다.
나머지는 참담한 수준.
세상 잃은 표정으로 방 바닥에 수그리고 앉아있었다. 불도 모두 끈 채 불을 내뿜는 모니터만 하나 남겨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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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딸깍딸깍'
열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누나가 모두 함께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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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아진 거실의 불빛. 그렇게 잘 참았는데. 끝내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온다
부모님께서 잘 봤냐고 물어보실 틈새도 없이..
'죄송해요...... 엉엉... 잘 못봤어요.... 진짜 열심히 했는데... 정말 죄송해요 엉엉엉...'
집안 분위기는 냉랭하고 참담하다. 조용히 아버지께서 예약해 두신 레스토랑에 가자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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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나가 식사를 하며 그래도 수고했다고 격려를 받고 있다.
이 때 휴대폰이 울린다. 담임 선생님 이시다. 당시 내가 반에서는 1등 성적이었기에 가장 먼저 전화하셨으리라
"재성아."
"선생님 죄송합니다."
"..고생했다 괜찮다 수고했어"
"생각보다 잘 못본거 같습니다. 정말 많이 도와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제 등급제로 바뀌기도 했고, 2등급은 나오겠지. 2등급에도 좋은 학교 많다. 오늘은 일단 푹 쉬어라 고생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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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풀죽고 식사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앉았다.
막 켠 TV에서는 재수생 하나가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 한다
"이번 시험이요? 별로 안 어렵던데요? 작년이나 올해나 비슷한거 같아요"
아직도 그 사람의 조롱하는듯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분노가 치밀 기운은 없었다.
나는 '시험을 못 본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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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6시 뉴스가 지나 계속 속보가 들어온다
'올해 수능 작년과 비슷하거나 다소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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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여전히 못본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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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8시 뉴스에는 다소 다른 소식이 들어온다
'올해 수능 작년 대비 어려웠던 것으로.. 평균 10-20점 하락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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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정도 하락으론 내 점수보다 적게 떨어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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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뉴스
'올해 수능 작년 대비 매우 어려워. 평균 50-60점 하락, 상위권 30점 이상 하락 전망'
'.......? 잠깐 30점 이상이면 나도 괜찮을 수 있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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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뉴스
'수능 테러!! 최대 100점 하락 전망. 난이도 실패 책임 누구에게 있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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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무거운 마음을 떨치고 등교한 다음날
학생 주임 선생님이 나를 보자마자 붙잡으신다
'김재성이!!! 너 몇점이야!!!'
'아 저 XXX점 나왔습니다'
'수학은 과학은 외국어는!!'
참고로, 세 과목은 당시 내가 지망하던 학교의 선별 과목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때의 수능은 작년 대비 훨씬 어려워 모두가 큰 점수 하락폭을 겪었다
나 역시 평소 시험 대비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백분율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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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능 이야기는 여기 까지지만, 아직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오늘 밤 수능 성적을 비관한 재수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안타까운 사연이지만 평소 약대를 지망했던 그 분은, 이번 수능 시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연은, 수능이 어려워진걸 모르고 목숨을 끊은건데 당시 맞았던 점수 기준이면
충분히 지망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던 성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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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느낄 수 있던 온갖 감정을 뒤섞어 만났던 듯 하다.
나라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산 사람이었고, 결국 좌절하는 사람이었으며, 다행이 원하는 결과에 다가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 날 겪었던 모든 일들을 수백만명이 이미 겪었고 앞으로도 겪기 때문에 특별한 경험은 아닐테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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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 날. 가장 전쟁같았고 가장 긴장되었던 그 날도
내가 그 이후 살아온 십수년 중 하루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 역시 그 날이 모든 것이라 생각했고, 나 역시 그 날에 모든게 결정된다 믿었던 사람이기에
어줍잖은 조언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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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해서 온 몸에 힘이 들어갔던 수능날도. 그날 집에 와서 가채점 후 울먹이던 시간들도
대학 입학 후 적은 용돈 쪼개 쓰겠다고 아침을 삼각김밥 두개로 때우며 물도 안 사먹고 가슴 쳐가며 등교하던 모습도 전부 한 때 어렸고 젊었던 날의 좋았던 기억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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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너무 속상하고 괴로운 일이 올지라도. 아주 잠깐만 인내해 주었으면 한다.
그 고통이 진짜가 아닐수도 있고, 고 3을 지나친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 그 날이 정말
모든걸 결정 짓는 날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걸 다 떠나. 당신은 정말 소중한 사람이고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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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당연히 잘 보는 시험이 훨씬 기분 좋으니까
그 어떤 모의고사 성적보다도 더 좋은 성적 거두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작가 김재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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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재성
서울대학교 컴퓨터 공학부를 졸업하고 맥킨지 앤 컴퍼니 (McKinsey & Company) 컨설턴트로 재직했다.
현재 제일기획에서 디지털 미디어 전략을 짜고 있다.
저서로는 행동의 완결,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시즌 I, 퍼펙트 프리젠테이션 시즌 II 가 있다.
온라인 서점 구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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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배기에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