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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더하기 Mar 16. 2019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난설헌 - 최문희

내게 가장 뜻깊게 읽을 책을 뽑아달라는 질문이 오면 어김없이 소개하는 책이 바로 최문희 선생님의 '난설헌'이다.

재미도 재미려니와 문장 하나하나 허난설헌의 그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게 표현된 느낌을 받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문체가 난설헌 허초희의 모습을 닮았을까? 희고 고운 모습 그대로, 바람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녀린 흔들림까지도 문장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인기척을 내고 다녀라. 초희는 숨도 안 쉬나 봐' 

소설 초반부에 나오는 이 문장이 난설헌의 숨조차 쉬기 힘들었던 삶과 조선시대 아녀자로 살아가야 하는 고단함을 대변하는 문장이다. 숨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으면 안으로 쉬는 숨결은 얼마나 가쁜지 아무도 모른다. 

'나에게는 세 가지 한(恨)이 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남편의 아내가 된 것.'

스물일곱에 나이로 짧고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조선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 

먹물로 얼룩진 그녀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비련 한 여인의 마음과 뒤쳐진 조선의 사회상을 느껴보도록 하자.


먼저 앞서 언급한 대로 본 소설의 문체가 얼마나 여리고 고운지 소개해 보겠다.

'구월 열하루, 북한산은 붉은 띠를 두른 듯 단풍이 한창이다. 올해는 유독 아침저녁 날씨가 차가웠던 탓인지 비둘기 핏빛 색의 단풍이 자지러질 듯 곱다. 선지피를 흩뿌린 듯 선연한 색조가 산허리를 휘감았다. 미시가 지나자 차츰 선연하게 물들었던 선홍빛이 충충하게 사 위어 든다. 해가 구름 속으로 자맥질을 치는 탓이겠거니, 붉은 휘장을 두른 듯 발갛다. 순식간에 어스레한 안갯속으로 사위는 그 찰나적인 광휘가 동공을 찌르는 듯하다. 산마루에 걸린, 자줏빛으로 변한 노을은 숨길 잦히는 생명의 마지막 발열처럼 활활 타오른다. 저건 노을을 삼키는 산마루의 광휘인가.'

느낌 그대로, 쓰인 그대로 평범한 단풍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 안에 허초희에 모습이 겹쳐 지나간다. 단어 하나하나 매우 강렬해 보이는 듯 하지만 연결된 하나의 문장은 너무나도 여리게 다가온다.

다시 한번 예찬하지만 본 소설의 문체는 진정으로 난설헌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아름답고 곱다. 딱 난설헌을 표현하고 그녀의 삶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문장처럼 말이다.


소설을 15세 허초희가 시집을 드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허초희에 삶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확연히 나뉜다. 엄격한 조선의 유교적 고리에서도 자유로움을 갖고 생활하던 여인에서 틀에 맞춰 생활하고 아녀자로서의 도덕을 중시하는 일반적인 조선의 사회로 들어간 여인으로 나뉜다. 확연히 구분되는 두 환경에서 허초희는 많은 고난과 갈등 그리고 반목을 일으키게 된다.

시어머님은 초희에 몸가짐, 마음가짐 그리고 그녀의 유난스러운 글 솜씨까지 모두 못 마땅하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다해주어야 하는 신랑마저 그녀를 곱게 보지 못한다.

'아래를 더듬는다. 신랑의 손길은 너무나 성급하고 너무 거칠고 너무 제멋대로다. 그러나 신랑은, 나를 거부하는 건가, 이런 버르장머리가 있나. 지난 초저녁부터 성질을 돋웠다. 시를 읊어보라는 말에 한마디 말없이 침묵으로 묵살했다. 하늘 같은 남편의 말을 무시하는 그 오만함.'

시작부터 어긋난 신랑 김성립과 신부 허초희에 생활은 무미건조함 그 자체로 흘러간다. 정복하려는 자와 정복당하지 않으려는 자와의 사투처럼 그들의 관계는 남남보다 무섭다.

어찌 보면 허초희 그녀 자신도 조선시대 여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같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던 제도권을 이탈한 그녀의 행동은 점점 사회와 아니 그녀가 속한 시댁과는 동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미가 붓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나 윗목으로 물러가 섰다. 시어머니 송 씨의 눈에는 그런 며느리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가 오만 방자하게 보였다.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언제 보아도 범접할 수 없는 차가움이 서려 있는 몸가짐, 그것이 송 씨의 분노를 늘 부채질했다.'

반복되는 허초희에 행동은 오히려 그녀 자신을 나락으로 몰고 가는 건 아닌지. 조금이라도 시댁의 품에 드려 노력했다면 그녀의 삶이 나아졌을까?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촛불 꺼진 어두운 방 안, 봉창으로 새벽빛이 트여왔다. 풀어진 옷고름과 주름이 뜯겨나간 치마를 추스르며 그미는 윗목에 오도카니 앉는다. 성립이 일어나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찾아 묶으며,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미를 흘깃 보고는 방문을 닫고 나간다. 중대문으로 나서며 성립은 가래침을 돋우어 뱉는다.'

참으로 애석하다. 잠자리마저도 욕구를 달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하는 것인가? 침을 뱉어 돌아서는 남편의 모습을 지금 사회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시댁에서 부침을 겪는 난설헌 선생님의 애처로움이 동감이 가고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 본 책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상황 상황을 동감할 수 있도록 하는 글 솜씨와 읽으면서도 그 느낌이 보는 듯 전달되는 노련함에 절로 머리 숙여진다.


허난설헌이 시집으로 드는 과정과 그곳에서의 부침으로 인한 갈등, 고뇌 등이 소개되는 전반부 이야기를 지나 후반부에서는 부친인 초당 선생님의 죽음과 오라버니의 귀양을 소개하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아이들이 등장하여 더욱 애절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첫아이를 유산하는 과정은 진짜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참담하기까지 하다. 부친의 장례를 치르며 고단함을 이어가던 선생님은 앞으로 이어질 아이와 연관된 슬픔의 서막으로 첫 아이를 유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아랫도리가 축축해서 긴가민가하던 그미는 얼른 삼베 치맛자락을 들춰보았다. 불그레한 핏물이 든 삼베 치마를 보는 순간, 그미는 후루룩 방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혈이었다. 그미는 허망하게 첫 아이를 잃었다. 잉태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이었다.'

앞으로 전개될 슬픔이 여인으로서 아니 어머니로서 감내하기에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알려주는 신호탄과도 같은 사건이다. 그렇게 슬픔이 깃들고 그것을 잊을 시간도 없이 선생님은 또 잉태를 한다. 선생님의 첫째는 따님이다. 부부간의 관계가 서먹하고 형식적인 것이 여도 잉태의 신비는 지나쳐가지 않는 모양이다. 

선생님과 첫딸인 소헌 아기가 거처하는 별당은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고 아궁이에 문제로 겨울에는 그 추위를 이겨내기조차 힘든 곳이었다. 

'입을 벌리면 더운 입김이 방 안의 차가운 공기에 섞여 부옇게 눈에 보일 정도로 추웠다.'

더욱이 딸에 대한 조선사회의 삐뚤어진 시각이 두 모녀를 더욱 애잔하게 몰고 간다. 

'소헌의 백일이었지만 시어머니는 물론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건천동 친정에서 백일 떡과 옷가지를 보내왔지만 시어머니는 보따리 속을 점검한 후 시큰둥하게 별채로 내려 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계집아이한테 백일상이 가당키나 하더냐.'

세상에 어머니 없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위대함을 잊어서도 안 된다. 세상에 제일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이 바로 어머니이다. 그 시작은 딸이다.

선생님은 점점 무기력해져 간다. 그리고 서서히 무너져 가기 시작한다. 부친의 죽음과 오라버니의 귀양 그리고 점점 더해가는 시댁의 멸시가 몸서리치듯 선생님을 휘감아 간다.

'그미는 입술의 아린 통증을 느낀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가. 입술에서 떨어진 피가 들고 있던 어머니의 편지 위에 선영한 방울을 만들었다.'

나를 버리고, 나를 팽개치고, 나를 숨기고, 나를 가두고 살아온 세월.

선생님의 두 번째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강릉 외가에 가서 몸은 푼 선생님이 해산 후 15일 전후하여 시댁으로 돌아왔다. 아! 남아선호 사상.

'에고 내 새끼, 먼 길 오느라 고생했구나. 산고를 치르고 먼 길 달려온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는 시어머니. 네 자식이기 이전에 김 씨 문중 장손이니라. 어설픈 어미 노릇 할 생각 말고 네 몸이나 충실하게 건사하도록 하여라.'

이후 선생님은 소헌, 재헌 남매를 마지막 순간을 제외하고 만나지 못한다. 자식은 어머니를 찾고, 어머니는 자식을 거두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한다. 이런 본능적인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아 세우는 무정함이 진정한 정성인지 나도 함께 물음표를 던져보고 싶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욱하는 감정이 앞선다. 지금이 그 시대도 아니요 그렇다고 내게 처한 상황도 아닌데 실로 눈에 보일 듯 잡히는 이 모든 글귀들과 내 마음속으로 속속들이 박히는 이 감정들.

'아이들 얼굴만 떠올려도 빗물처럼 흐르는 눈물이 눈을 가려 어제도, 내일도, 모레도, 지금 서있는 이 자리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분하고 슬픈 일이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소헌 아기가 어머니에게로 온다. 그렇게 대엿새를 열꽃과 씨름하던 아이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세상을 등지게 된다. 

'화로를 안은 듯 절절 끓는 아이를 안은 채 그미는 처음으로 세상을, 사람들을 한없이 원망했다.'

그리고 세돌된 재헌 아기가 또다시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삭정이처럼 말라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미는 솟구쳐 오르는 오열을 토해냈다. 오만가지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부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밤이 기울도록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가을에 큰 아이를 묻고 다시 겨울에 작은 아이를 가슴에 묻는 어머니의 마음. 어찌도 이렇게 비련 할까 싶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나조차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치가 떨린다.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리오.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조선의 천재 시인은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碧海浸瑤海)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靑鸞倚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芙蓉三九朶)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紅墮月霜寒)


'초희야. 너무 영민함도, 너무 다정함도, 지나친 나약함도 이 세상에 배겨 나지 못하는 것을, 어쩌자고 머릿속에 촛불을 켜고 산다더냐.'

책 뒤편에 소설가 하성란 선생님의 이런 말씀이 있다.

'허난설헌은 두 번 태어났다. 사백여 년 전에 한 번, 작가 최문희에 의해 또 한 번. 죽었으되 죽지 않는다는 말의 뜻을 이제야 실감하겠다.'

나 역시도 짧은 생을 마감한 비련의 여류시인으로만 알고 있던 허난설헌 선생님의 새로운 이면을 알게 된 소설이다. 허구와 진실을 넘어서 내게 이렇게 아름답고 눈부신 여류시인을 소개해준 최문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여린 꽃잎이 바람에 날려 빙글 거리며 땅 위로 떨어지는 모습. 이런 표현으로 이 책이 묘사될 수 있을까? 소설 '난설헌'! 물을 들지 않는 새벽 연잎 위에 맺힌 이슬처럼 투명하고 영롱하다.


참고로 강릉... 우린 아름다운 여행지로 소개되는 그곳에 가면 허난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강릉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 흔적을 찾는 여행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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