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자전거 바퀴를 굴릴 때마다 달아오른 아스팔트 냄새는 오늘도 여지없이 더울 거란 메시지를 보내는 듯싶다.
하지만 더운 바람 너머로 교복에 뿌려둔 섬유탈취제가 향기로워 기분이 좋아지던 참이었다.
그렇게 약간은 더운 바람과 섬유탈취제의 향기 사이로 가끔 쇠 냄새가 나긴 했지만 대수롭진 않았다.
잠시 멈춰서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 아파트에선 경비 아저씨가 고무호스로 입구 쪽 길가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햇빛은 6월답게 조금씩 따끔거렸지만 기분 나쁜 정도는 아니었다.
할머니와 갈색푸들이 산책을 하는지 내 옆에 서서 신호를 기다린다.
헥헥 거리며 혀를 길게 뺀 푸들모습이 오늘 제법 돌아다닌 모양새였다
시골과 도시의 중간쯤 되는 이곳에선 뭐 하나 특별한 게 없었다.
따분하다.
늘 같은 풍경…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가 등을 톡톡 건드렸다.
“신호 바뀌었어.”
그녀의 짧은 한마디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페달을 굴렸다.
아마도 그녀와 학교 땡땡이를 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페달을 굴리고 다음 신호등 앞에 잠시 멈춰 섰을 때 아까와 변함없는 풍경에 난 가벼운 한숨을 내 쉬었다.
’이 동네는 어딜 가든 참 한결같구나’라고 생각했을 때 방금 전의 할머니와 푸들도 내 옆에 섰다.
혀를 빼고 헥헥거리는 게 방금 전의 그 푸들이었다.
푸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주변의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아파트, 신호등, 경비아저씨 모두가 방금 전 본 그것들이었다.
다시 고개를 할머니 쪽으로 돌리려는 그때 그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신호 바뀌었어.”
그 한마디에 난 아까와 같이 페달을 저었다.
“신호 바뀌었어.”
“신호 바뀌었어.”
“신호 바뀌었어.”
.
.
.
몇 번 아니 몇백 몇천 번의 반복일지 모른다.
건널목에서 할머니와 푸들을 보고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엔 여지없이 등뒤의 그녀가 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든다.
영겁의 반복에서 다시 신호등 앞에 섰다.
하지만 이 앞은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그녀가 내 등을 만짐과 동시에 신호가 바뀌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 페달을 저으려는 그때
건너지 마!!!
강력한 목소리가 내 머리를 울렸다.
그 말에 내 발이 멈칫거리며 뒤돌아 보니 푸들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했다
할머니가 아닌 푸들이 우렁차게 말한 것이다
짖은 게 아니냐고?
아니 분명 건너지 마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내 뒤의 그녀는 변함없이
“신호 바뀌었어”라고 말했지만 당황스러움이 배어 나왔다
“신호 바뀌었어. 건너. 건너! 어서 건너!!! “
등뒤의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어느새 말이 아닌 비명에 가까워졌다.
건너!!!
어서 건너!!!
어깨에 닿은 그녀의 손은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힘이 실렸다.
어깨를 돌려 뿌리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어깨가 부서질 듯이 고통스럽다.
그 고통 속에서 여러 의문들이 돋아났다.
애초에 내 뒤에 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내 친구인가?
여자친구인가?
나는 누구지?
몇 살이지?
수많은 질문이 살을 베여 뿜어져 나오는 피처럼 머릿속에서 그렇게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금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쇠 냄새…
아니다
그건 쇠 냄새가 아니다.
피비린내였다.
내 등뒤에서 나는 피비린내…
그녀의 것인가?
그녀가 누군지 모르겠다.
이제는 무서운 존재라는 그것뿐이었다.
그녀가 내 어깨를 붙잡고 앞으로 밀치려 한다.
저길 건너면 뭔가 잘못될 것 같다…
지면에 발을 딛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여자의 힘이라고 믿지 못할 괴력으로 그곳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누군가 도와줬으면
제발…
’ 도와주세요 ‘
그 순간 푸들이 뛰어올라 내 어깨를 누르던 그녀의 손목을 물고 늘어졌다.
힘이 빠진 그 순간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어 있는 힘껏 페달을 저었다.
저 붉은 기운이 있는 그곳에서 멀리 벗어나야 한다..
그 생각뿐이었다.
내 등뒤에서 들리던 그녀의 비명 같은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나중엔 귓속의 이명처럼 사라져 버렸다.
할머니와 개 덕분에 반대편의 찬란한 그곳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뜨게 된 곳은 어느 병원이었다.
의식은 흐릿했지만 ’ 살았다’ 그 생각뿐이었다.
알고 보니 약 보름동안 의식이 없었던 상태였다.
그 후 어느 정도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내 옆엔 형사와 순경 2명이 있었다.
교통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 사고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수갑을 차고 있지? 그 생각뿐이었다
혹시 심하게 발버둥이라도 친 건가?
곧바로 형사로 보이는 이가 말을 이었다.
뺑소니… 그것이 죄목이었다.
무고한 여고생을 치고 도주한 가해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생을 치기 전 어떤 노인네도 치었다는 것이다.
음주운전에 뺑소니.. 그리고 6미터쯤 되는 도랑에 떨어진 것까지…
형사는 그날 일을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에선 경멸감이 흘러나왔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으며 생각해 본다.
그런가? 그럼 그 꿈속에 나온 여고생과 할머니를 친 듯싶다.
허탈하게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반사된 모습은 고등학생도 아닌 40대의 거무튀튀한 모습의 퀭한 어떤 이가 비칠 뿐이었다.
실소가 터져 나온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인 듯싶었다.
그때 죽었어야 하는데…
며칠뒤 호송차에 몸을 실을 때였다.
유가족들이 어찌 알았는지 욕을 퍼부으며 죽일 듯이 덤벼들었고 경찰들이 말리고 있는 형태였다.
몇몇 방송국에서 나와서는 그때의 일을 취재하는 듯했다.
형사들과 함께 급히 호송차에 올라타자마자 차문이 닫힌다.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계단 위 어떤 젊은 여성이 보였다.
낯이 익다.
그렇게 생각할 때쯤 그녀 옆의 개가 보였다.
갈색푸들…
맞다 분명 꿈에서 본 그 개였다.
흔한 견종이라 우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분명하다
꿈속에서 그녀로부터 구해준 그 푸들이었다.
현실에서 마주하니 너무 놀라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 푸들과 함께 있는 젊은 여성의 얼굴은 꿈속의 할머니와 너무나 흡사했다.
뺑소니로 죽은 노인네가 어떻게 살아서 저런 젊은 모습으로 눈앞에 있단 말인가?
애당초 산 사람인가?
그렇게 혼란스러울 때 옆의 형사에게 물었다.
“당신이 뺑소니로 죽인 사람?
18살 서 xx학생, 그리고 78세 최 xx 영감님 “
영감? 뺑소니로 죽은 게 남자였다고?
그럼 저 할머니 아니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렇게 호송차는 조금씩 이동을 시작했다.
차가 이동하자 계단 위 그녀도 등을 돌려 제 갈길을 가려는 듯했다.
푸들이 그녀를 올려보자 그녀가 말을 잇는다.
“아니야. 그를 구한 게 아니라 그 아이의 혼을 구하려 한 거지. 그렇게 생사람을 억지로 명계로 끌고 가면 그 아인 원혼이 되거든. 그러면 성불하기가 어려워…
다만….
그 아인 이미 원혼이 된 건지 모르겠어.
그때 또 어떻게든 구해야 하겠지…
그 아이의 성불을 위해 그녀의 부모에게 받은 복채는 그렇게 쓰이려고 받은 거니까 as는 철저하게…
그리고 다음번엔 내가 성불시킬 때까진 그녀를 멸하거나 해하지 마
알겠지? 쿠베라”
그녀는 그렇게 혼잣말하듯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
호송차가 신호에 걸려 대기 중이다.
6월의 바람은 적당히 따뜻했고, 등 뒤에선 약간의 쇠 냄새가 난다.
쇠 냄새…
쇠 냄새?
그녀다.
그 아이의 피 비린내다.
그녀가 등을 두드린다.
“신호 바뀌었어”
다시 영겁의 반복이 시작된 것이다.
살아도 벗어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