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넌 이 일이 즐겁냐?

나의 직업 생존기 vol01 (시간의 불 연대기 순)

by 헤엄치는 새

넌 이 일이 즐겁냐? 내 눈엔 그렇게 안 보이는데...

30대 초반, 나를 자를 때 커피집 사장이 한 말이었다.


기술도 없고, 취업시장에선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나는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어찌 된 일인지 진득하게 한 가지 일을 못했다.

짧으면 보름, 길게는 두 달이었다.

기술이 없으니 서비스직이든 단순노동이라도 해야 했지만,

서비스직은 사람이 싫어서 단순노동은 나의 체력적 한계를 핑계로 그만 두기 일쑤였고, 이는 부모님의 속의 썩이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모두가 돈을 벌어야 할 형편이었기에 이런 나의 모습은 달가워 보이지 않았으리다.


그렇게 커피일을 시작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겐 인터넷에서 본 짧은 지식으로 커피예찬을 전파하며 내가 이일을 선택한 건 돈이 아니라 무언가의 끌림이라 강조했지만, 아메리카노도 만들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카페마저도 힘들게 들어갔다.


그렇게 처음 맞이한 카페란 직장은 해운대 달맞이에 위치한 'H'카페였다.

부산사람들은 알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해운대의 교통은 최악이다.

금정구에서 약 2시간을 버스, 지하철, 마을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출근길에 사고가 났고, 난 그곳을 그만둘 상황이었다.

약 3주의 출퇴근, 내가 배운건 서빙뿐이었다.

'H'카페 사장은 일방적으로 자른 게 미안했는지, 동아대 근처의 'C'카페 사장에게 나를 소개해줬다.

소개라기보단 내 입장에선 팔려가는 기분이었다.

'H'카페 사장은 빨리 나를 내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렇게 팔려간 'C'카페에선 주 6일을 오전 11시에서 밤 12시까지 일하는 조건이었다.

1시간 휴식, 저녁 제공, 그런 악조건에서 받기로 한 내 월급은 60만 원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그 당시 88만 원 세대라고 사회적 이슈가 한창이었을 때, 난 그보다 적은 60만 원으로 내 몸값을 메긴 것이다.

그렇게 난 헐값으로 'C'카페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친구들은 외노자(외국인 노동자)라고 놀렸고, 난 그곳에서 로스팅이랑 커피를 배우게 될 테니 약간(?)의 손해지만 나쁘지 않은 거래라 생각했다.


그곳에서 일하기로 약속했으니 이제 자취방을 알아봐야 했다.

싼 집을 구하기 위해 사하구 당리까지 가서야 월세 12만 원의 단칸방을 구할 수 있었다.

하단은 동아대 학생들이 이미 차지했던 터라 그 시기 남은 방도 없었고, 설령 있다 한들 가격을 맞출 수 없었다.


그렇게 당리에 집을 구하고, 일을 시작했을 때는 차비가 아까워 도보로 약 30분 되는 거릴 걸어 다녔다.

중간에 쉬는 1시간은 동아대 교정 빈 벤치에서 낮잠을 자고 들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게 멍하게 들어가면, 실수하기가 일쑤였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일을 잘 못했다.

몸은 느리고, 실수는 잦고, 그런 나의 모습을 보는 사장의 눈빛은 점점 나빠졌다.

사장의 지적이 늘었다.

동시에 손님의 클레임 역시 잦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사장이 날 제일 나쁘게 본건 아마 나의 식탐이었을 것이다.

행여 손님이 치즈케이크라도 남기면, 버리지 않고 몰래 내입에 털어 넣었다.

몇 번 사장에게 주의를 듣기도 했지만, 늘 배고픈 나로선 참기 힘들었다.

어디서 그런 비싼 디저트를 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건은 2주 후에 발생했다.

2주가 지났을 때 다음 달 1일이었고, 난 2주분의 금액 30만 원을 받았다.

그때 난 '딱 30이네요'라고 말했고, 돈을 주는 사모의 표정이 바뀌는걸 눈치챌 수 있었다.

사모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문제의 발언을 언급했고, 난 '죄송합니다'라고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다음날 사장은 옥상으로 나를 호출했다.

'넌 이 일이 즐겁냐?'라고 물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즐겁지 않았으니까...


하루 13시간, 다행히 일주일에 한 번은 쉬었으나 너무 힘들었다.

커피일이 보기보다 할 일, 신경 쓸 일이 많았다.

그냥 서 있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대부분의 시간을 서있다 보면 다리 붓는 게 예사였다.

나에겐 서있는 것도 노동이었다.


그는 나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자기도 힘든데, 해운대 사장님이 부탁해서 데려온 건데 뭐 하는 거냐고...

마치 선심 쓰듯, 내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뉘앙스가 너무나 거슬렸다.

하지만 그 어떤 대꾸도 안 했다.

그렇게 10분의 설교를 들었을까?


결국 난 보름 만에 잘렸다.

사모는 나의 눈을 피했다.

난 착하게도 그런 사모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나왔다.


점심시간 집으로 걸어가는 그날은, 봄이 막 시작되는 달이었고,

난 고작 12만 원의 월세랑 공과금을 걱정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친구에게 잘렸다는 문자를 보냈고, 그날 친구는 나에게 스모크햄 몇 덩이와 계란 한 판을 주고 갔다.

그날 저녁은 사치스럽게(?) 햄을 두툼하게 썰고 계란옷을 입히고,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치로 나름 호화롭게 먹었다.


그렇게 배부르게 먹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불안한 내 맘을 따스한 봄바람으로 달랬다.


그 뒤로 약 한 달 뒤, 새로운 일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커피일은 아니다.

다시 커피일을 하게 되는 건 그 후로 약 2년 뒤에 접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난 절망기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이라고 확연히 나아진 건 아니지만, 그땐 인생이 더 꼬여있던 시기였다.

울기도 많이 울고, 좌절도 수없이 겪었던 시기...

이렇게라도 남겨서 나를 돌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괜찮아...

오늘만 견디자. 오늘만.......

언젠가 찾아올 나의 황금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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