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팀플이 필요한데...
* 초반 문단에는 자랑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보기 싫으신 분들은 건너뛰고 보셔요 ;)
교수를 평가하기 위한 다양한 기준이 있다.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은 당연히 논문 실적이고, 그 외에도 재임용을 위한 다양한 기준이 있다. 승진 및 재임용을 위한 기준 중 크리티컬 하진 않지만 나쁜 평가를 받으면 기분이 나쁜 것이 바로 '강의평가'이다. 강의평가에 관해서는 예~전에 한 번 포스팅한 바 있다. ( 링크 : 익명의 강의평가는 늘 두려워요 ) 우려했던 것과 달리 지난 1학기 강의평가 점수는 예상외로(?) 상당히 높게 나왔다. 5점 만점에 4.74점이 나왔으며, 전공과목 중 하나는 4.81점이 나왔다. 학교 전체 평균이 4.54점인 점을 감안하면 꽤나 높은 점수이다.
2학기에 개설하는 전공 교과목들 역시 꽤나 인기가 있다. 프로그래밍을 직접 해보는 실습 교과목은 코딩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40명 정원이 거의 다 차는 기이한 현상을 보였다. 또 다른 전공 이론 교과목은 당초 정원 상한을 50명으로 지정하였으나, 수강 신청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정원이 다 차는 바람에 정원 상한을 80명, 100명, 120명, 150명으로 늘려나갔으며, 결국 150명이 꽉 차는 수업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2학기 강의하는 전공 교과목 중 유독 한 과목만은 인기가 없었다. 폐강 기준인 15명을 겨우 넘기며, 결국 19명만 수강신청을 한 것이다. 다른 전공 교과목들과 달리 이 전공 교과목만 특이하게도 인기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2학기가 개강하고 이 과목의 강의 첫날, 강의를 들으러 온 학생들에게 왜 다른 학생들은 수강 신청을 많이 안 했는지 추측되는 이유가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니 돌아오는 답변.
팀플 한다고 강의 계획서에 적혀 있어서요
처음부터 무리인 시도였을까? 학생들이 조별과제와 같은 팀플을 싫어하는 것을 얼핏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전공 교과목들이 이론이나 실습으로만 진행될 수는 없는 노릇. 이번 학기에는 무리를 해서 팀프로젝트를 한 학기 동안 해보고 이를 평가해보고자 하였는데, 다수의 학생들이 강의 계획서에 있는 팀프로젝트란 용어만 보고 수강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대학원생들에게 왜 학생들이 팀플을 싫어하는지 물어봤다. 그 이유는 다양했지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우선, 팀플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식.
시험을 통해 성적을 평가받게 되면 자신이 한 만큼 정당하게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팀플은 팀을 잘못 만나게 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팀프로젝트 성과는 개인의 노력과 무관하게 팀 전체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 그래서 자신이 노력한 것에 비례해서 성적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 팀플 수업을 기피한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팀'으로 활동하는 것을 꺼린다는 것.
팀프로젝트마다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일부 구성원들. 프리 라이더(free rider)의 존재 때문에 팀플이 기피되고 있다. 파레토의 법칙이든 뭐든 간에 팀으로 일을 하게 되면 일부 구성원들이 대부분의 작업을 담당하게 되고, 일부 구성원은 덜 노력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노력을 많이 기울인 학생들이 불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의사소통의 문제, 성격의 차이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팀플을 피하기도 한다. 또한, 일부 학생들은 프로젝트 목표치를 높게 잡아 팀원들을 강하게 이끌어가고자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프로젝트를 완료하려고 할 수도 있다.
문제는 단순 불만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학생들이 조별과제 수업을 기피하는 것이다. 조가 랜덤하게 구성이 되었을 때 소위 말하는 빌런을 만나게 되면 스트레스만 가중되니 애초에 스트레스를 차단하기 위해 팀플 수업은 수강신청 자체를 안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수들은 왜 학생들이 이렇게 싫어하는데도 조별과제를 내는 것일까?
일부 인터넷에서는 수업 편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글들을 볼 수 있다.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요즘과 같이 클레임 하나하나가 크리티컬 해진 상황에서 논란의 소지가 될 수 있는 팀플을 억지로 시키는 교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별과제를 내줄 바에야 차라리 그냥 수업을 하고, 시험을 출제해서 성적을 내는 것이 몸도 마음도 훨씬 편한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일까?
학생들은 졸업하면 사회에 나가게 되고 1인 스타트업을 하지 않는 이상 조직에 속해서 일을 하게 된다. 1인 스타트업 역시 주변 기업들이나 관계자들과 협업이 이뤄져야 하기에 혼자서 일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처럼 사회는 커다란 팀프로젝트의 연속이다. 사회에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식을 쌓는 대학에서 팀프로젝트로 미리 사회를 체험해 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무리 개인 퍼포먼스가 뛰어나도 협업 능력이 없는 직원은 조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컨설팅 기업인 맥킨지(McKinsey)의 경우 협업 능력이 없다고 평가되는 직원은 개인 성과가 아무리 좋아도 해고당한다. 특히, 내가 속한 경영학과에서는 협업 능력이 필수이다. 그래서 많은 경영학 수업에서 조별 과제를 도입하고 있다. 협업과 상호 교류가 필수적인 전공의 특성상 협업 능력을 배울 수 있는 방법으로는 팀프로젝트가 가장 효과적이다.
또한, PT 능력을 향상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업 방식이 팀프로젝트이다. 삼성전자 재직 시절, 전략팀에 잠시 파견 갔을 때 처음 몇 달간 보고서 쓰는 연습만 주야장천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콘텐츠가 좋아도 이를 전달하는 방식이 세련되지 못할 경우, 해당 보고는 폭망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하곤 하지만, 결국 보고를 받는 주체 역시 '사람'이기에 형식은 안 중요할 수가 없다. 특히 경영학도라면 PT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보고 자료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만들지, 발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할지 등의 능력이 콘텐츠만큼이나 중요하다.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면 제일 기억에 남는 수업들이 밤을 새워가며 했던 팀프로젝트 수업들이었다. 그 수업들을 통해 익힌 전공 지식들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직전에 포스팅한 중간고사 관련 글과 같이 수업을 '성적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닌 '스킬셋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면 팀프로젝트에 임하는 자세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물론 교수도 최대한 공정하게 조별과제가 진행될 수 있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학생들 간 다면평가, 발표자 외 조원들에게 질문, 개인 리포트 제출 등을 통해 최대한 공정하게 성적이 산출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야 학생들이 조별과제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이런 고민의 과정들이 있기에 개인적으로는 조별과제를 포함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시험을 내는 것이 훨씬 편하기에. 하지만 조별과제가 정말로 필요한 수업도 있어 이를 커리큘럼에 포함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많은 학생들이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쉽진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