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은 부모의 몫
파주 보광사라고 들어보셨나요?
대중에게 아주 유명한 사찰은 아니다. 경기도 파주 고령산 자락에 위치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절인 보광사에 지난 주말 단풍 구경을 겸해 방문했다. 절정으로 향해가는(10월 말에는 단풍이 절정이었다) 단풍을 즐기기 위해 주변 사찰을 찾아보다 알게 된 곳이 바로 보광사였다.
대구에 잠시 거주하던 시절에는 차로 1시간만 가도 가볼 만한 사찰이 아주 많았다. 대구의 가장 유명한 사찰인 동화사를 비롯하여, 근처 영천의 은해사도 풍광이 좋기로 유명하다. 1시간 조금 오버하면 경주의 불국사는 물론이고 의성의 고운사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는 서울을 벗어나는 데에만 1시간이 걸리니 어디로 가는 게 쉽지만은 않다. 서울 생활의 단점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불교 신자인 건 아니다. 그저 사찰이 주는 평온함과 고즈넉함의 매력에 빠졌을 뿐. 국내를 여행할 때면 꼭 사찰은 한 곳씩 들리는 것 같다. 지금까지 가본 절 중에서 가장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은 역시나 고창의 선운사와 순천의 송광사였다. 같은 맥락에서 성당에 방문하는 것도 좋아한다. 유럽을 여행할 때면 당연히 그 도시의 대성당을 우선적으로 방문하게 되고, 서울에서는 명동성당, 대구에서는 계산성당을 종종 들르곤 했다.
다시 보광사로 돌아가서, 보광사는 유명세는 조금 덜하지만 방문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서울 근교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에 나들이 명소가 많아 절을 둘러보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이다. 게다가 사찰의 접근성도 좋아 지난 주말 방문했을 때에도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많았다. 일주문의 풍광만 봐도 단풍과 어우러져 멋지지 않은가? 우리 아이는 입구에서부터 아주 신이 났다!
MBC에서 2010년에 방영한 드라마 <동이>를 기억하는가?
조선의 21대 왕 '영조'의 친모인 숙빈 최씨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배우 한효주가 숙빈 최씨인 동이 역할로 열연하였다. 사극으로 유명한 이병훈 PD가 연출을 맡아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시청률 역시 20%대로 흥행에도 성공한 작품이다. (물론 나는 보지 않았다)
갑자기 드라마 이야기를 한 이유는 바로 보광사가 동이인 '숙빈 최씨', 그리고 그의 아들 영조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영조는 1740년 숙빈 최씨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보광사를 지정하였다. 실제 숙빈 최씨의 능인 소령원 역시 사찰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웅전 오른쪽을 보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작은 전각이 보인다. 바로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신 '어실각'이다. 비록 방문했을 때에는 어실각이 닫혀 있어 위패를 보지는 못했지만, 어실각 바로 옆에 늠름하게 자리 잡고 있는 향나무는 볼 수 있었다. 이 향나무는 어머니를 지켜달라는 마음으로 직접 영조가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니라는 설도 있다) 영조의 마음이 닿아서일까. 향나무는 아직도 푸르게 어머니의 전각을 지키고 있다.
단순히 단풍을 보기 위해 방문한 사찰에 이러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고 하면 더 재밌지 않은가?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없는 멋진 절을 둘러보니 가을의 절정이 지나고 있음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대웅보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 국화꽃들은 가을의 정취를 맡을 수 있게 하고, 보광사 뒤로 펼쳐진 고령산 역시 울긋불긋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가을에 사찰을 방문하는 묘미이다.
사찰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식사를 하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정오가 되니 사찰에서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근처 식당을 찾고 있던 우리에게 아주 솔깃한 소리였다. 그렇게 식당을 방문해 보니 절에서 주는 사찰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바로 산채 비빔밥!
무료이긴 하지만 성의를 표할 수 있게 준비도 되어 있었다. 우리도 마음을 담아 시주를 하고 식사를 시작하였다. 엄마와 아빠는 비빔밥에 익숙하니 맛있게 먹을 수 있었지만 최근 밥을 잘 안 먹는 아이 입맛에 맞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혼자서 고추장이 들어 있지 않은 비빔밥 한 그릇을 흡입하고 있다. 절에서 떡도 나눠줬는데, 자기는 떡을 못 받았다고 공기를 들고 떡을 받으러 가기도 한다. 그리고 밥을 다 먹고 나니 아이가 큰 소리로 외친다.
공깃밥 하나 더요!
아아! 부끄러움은 엄마와 아빠 몫이다. 사찰에서 밥을 먹으며 공깃밥 하나 더를 외치는 34개월 아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잠시 부끄럽긴 했지만 밥을 잘 먹어줘서 너무나 기특한 아이였다.
식사를 마치고 보광사 사찰 뒤편에 있는 전나무 숲길을 산책해 본다.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높이 12.5m의 석조대불이 보인다. 우리 아이는 불상을 보고 달려가면서 외친다.
예수님, 하이파이브!
부처님의 손바닥이 하이파이브하자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런데 왜 자꾸 부처님을 예수님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부처님, 예수님 모두 죄송합니다. 아직 아이가 뭣도 잘 모릅니다 T_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