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가 많은 런던 여행 (2019. 11.20)
영국의 런던에는 유명한 주소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주소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들어본 그곳! 킹스 크로스역의 9와 3/4 승강장(Platform 9 3/4 at King's Cross Station)이다. 런던에 위치한 킹스 크로스역의 9번 승강장과 10번 승강장 사이에 있는 곳으로,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호그와트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승강장은 마법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벽을 통과하게 되면 호그와트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다.
또 다른 유명한 주소는 바로 '베이커 가(Baker Street) 221B 번지'이다. 아서 코난 도일 경(Sir Arthur Conan Doyle)이 쓴 불멸의 작품 <셜록 홈즈 시리즈(Sherlock Holmes)>의 주인공인 셜록 홈즈와 그의 친구인 의사 존 왓슨(John Watson)의 하숙집 주소가 바로 베이커 가 221B 번지이다. 셜록 홈즈가 연재되던 당시에는 베이커 가 221B 번지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셜록 홈즈의 광팬들을 지칭하는 셜로키언(Sherlockian)들의 민원으로 가상의 주소가 실체가 되고, 현재 그 위치에는 셜록 홈즈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2019년 런던에 출장을 가며 가장 기대가 되었던 것은 빅 벤도, 런던 브리지도, 런던 아이도 아닌 바로 셜로키언의 성지 '베이컨 가 221B 번지'에 위치한 홈즈의 하숙집을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런던의 수많은 명소들을 두고 홈즈의 하숙집을 방문 1순위로 꼽은 것은 셜록 홈즈 시리즈가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동화책 전집 중에서 특히나 관심을 끌었던 것이 홈즈의 단편 이야기들이었다. 그중 <빨간 머리 연맹>이나 <얼룩 띠의 비밀>, <여섯 개의 나폴레옹 석고상> 이야기는 어린 시절 읽었던 판본이 아직 기억이 날 정도이다. 빨간 머리 연맹을 읽으며 세상에 빨간 머리가 존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며, 특히 얼룩 띠의 비밀에 나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섬뜻하게 느껴졌다. 어린 마음에 마지막 결말이 충격적이기도 했고 제목 그대로 얼룩 띠의 비밀을 알고 나서부터는 안 그래도 싫어하던 존재인 '얼룩 띠'를 더욱 무서워하게 되었다.
셜록 홈즈를 접한 이후부터 추리 소설은 최애 장르가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소년탐정 김전일>에 푹 빠져 살았고, 대학 시절에는 일본 추리 소설에 한동안 빠져 살게 된다. 가난하던 대학원 시절 한 푼의 돈이라도 벌기 위해 시작한 교내 도서관 근로 아르바이트는 무료로 일본 추리 소설을 실컷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유명한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를 비롯해 다양한 작가의 작품들을 거침없이 읽어 나갔고, 도서관 알바 시절 읽은 일본 추리 소설만 200권 가까이 되었다. (문제는 단 기간에 너무 많은 책을 봐서 무슨 책을 봤는지,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안 난다는 것. 그럼에도 딱 하나 추천한다면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는 꼭 읽어보시길!)
런던 출장이 확정되고 제일 먼저 한 것은 셜록 홈즈 전집을 이북으로 지르는 것.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홈즈의 전집을 다시 한번 읽으며, 셜로키언으로서 빠심을 충전시킨 다음 베이커 가를 방문하는 계획은 다시 한번 생각해도 완벽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홈즈 전집을 읽는 동안 나를 태운 비행기는 런던으로 향하였다.
베이커 가에 위치하고 있는 셜록 홈즈 박물관은 당연히(?) 베이커 가 역(Baker Street Station)에 있다. 베이커 역에 도착하여 베이커라는 이름을 본 순간, 20세기 초반의 런던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러 가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처럼, 메카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이슬람교도들처럼, 라싸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티베트 불교 신자들처럼, 셜로키언의 성지로 향하는 마음은 두근반 새근반이다. (물론 성지 순례를 떠나시는 분들의 마음에는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베이커 가 221B 번지에 도착하니 셜록 홈즈가 맞이해 준다. 당연히 진짜 사람인 셜록 홈즈는 아니고 동상의 형태이지만 그럼에도 반가움의 마음이 앞선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매부리코, 특유의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홈즈이다. 어린 시절의 영웅 홈즈와 눈인사를 가볍게 나누고 본격적으로 홈즈와 왓슨의 자취집을 탐방해 본다.
먼저 셜록 홈즈의 팬이 아니라면 박물관을 방문할 필요는 없다. 박물관 자체가 상당히 작은 편이고 좁다. 게다가 관광 명소와도 떨어져 있어 굳이 찾아갈 이유는 없다. 다만, 본인이 셜록 홈즈를 감동 깊게 봤다면 성지 순례 목적으로 방문하기에 좋은 곳이다.
박물관의 크기는 정말 딱 1 타일 정도이다. 하지만 층마다 소설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들이 재현되어 있다. 홈즈가 실험을 하던 곳, 홈즈의 바이올린, 벽난로와 소파, 당시 신문들이 놓여있는 서재들을 둘러보다 보면 홈즈가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다. <셜록 홈즈> 영화를 봤던 분들이라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상이 될 것이고, <셜록> 시리즈를 봤던 분들이라면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떠오를 것이다. 누가 되었든 간에 본인만의 상상 속에만 있던 셜록 홈즈와 함께 하고 있는 기분을 박물관에서 느낄 수 있다. 이것 만으로도 셜로키언이라면 방문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박물관이 상당히 작기에 관람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적다. 그렇다고 바로 떠나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며 괜스레 남은 미련을 떨쳐본다. 기념품 가게는 여느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고가의 굿즈들로 가득하다. 셜록 홈즈라는 이름만 떼면 싸게 구할 수 있는 제품들이 많아 보이는데, 브랜드가 딱 붙는 순간 뭔가 있어 보이며 가격도 훅 뛴다. 이것저것 다 담아서 오고 싶었지만 원체 짐이 많았기에 눈물을 머금고 책 한 권만 구매를 하였다. 가장 실용적일 수 있는 것을 고르다 보니 구매하게 된 책 이름은 <The Sherlock Holmes Puzzle Collection>. 왓슨이 내는 추리 문제를 푸는 책으로 정답도 뒤에 있어 심심할 때 보기 딱 좋은 책이다. 모든 문제를 풀어본 건 아니지만 머리 식히고 싶을 때 보면 나쁘지 않아 아직도 책상에 자주 올라오고 있다. 볼 때마다 런던에서의 추억도 생각이 나니 1석 2조이기도 하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이야기가 한국을 대표하는 추리소설은 왜 없을까이다. 미국이나 영국은 물론 이웃 나라 일본까지 유명 추리소설 작가들이 주류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장르 문학이 주류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에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가 많진 않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국내 추리소설 작가를 한 분 추천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실 추리소설을 좋아하면 거의 다 아는 분이긴 하다. 바로 도진기 작가이다. 그는 판사 출신으로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판사 출신이 추리소설 작가가 되었다는 이력이 상당히 특이하다. 그가 추리소설 작가로 데뷔하게 된 계기는 일본 추리소설을 읽다가 자기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도전해 보게 되었다는 것.
도진기 작품은 세계관이 연결되어 있고, 해당 세계에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과 '고시생 탐정' 진구가 등장한다. 그리고 숙명의 라이벌 역시 등장한다. 최근에는 작가의 건강 사정으로 시리즈 물이 나오고 있지 않지만 고진과 진구 시리즈로 11권이나 시중에 나와있다. 전권을 다 구매하여 읽어본 입장에서 초반 작품은 조금 어설픔이 있지만 뒤로 갈수록 필력이 좋아져 손에 땀을 쥐는 스토리가 이어진다.
가급적이면 아래 '도진기 봇'이라는 트위터 유저가 적은 시리즈물을 순서대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붉은 집 살인사건>부터 <세 개의 잔>까지 이야기가 독립적이면서 또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다 보는 게 부담스럽다면 2014년 한국추리문학대상을 수상한 <유다의 별>을 강력추천한다. 백백교 살인을 소재로 한 유다의 별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대작이다. 시리즈물의 특성상 앞 권을 읽어도 좋지만 안 읽어도 충분히 볼 수 있다. (내돈내산 후기이며, 후원은 전혀 없었습니다 ㅎㅎ)
브런치북 <조금은 색다른 여행기> 3탄입니다. 이번에는 2019년 런던을 방문했을 때 이야기를 풀어보았습니다. 과거 브런치에 손흥민이 골 넣은 경기 직관기를 2부에 걸쳐 작성한 바가 있는데요. 당시 출장에서 있었던 다른 에피소드를 가지고 와봤습니다. 막판에 다른 곳으로 새긴 했지만 조금은 색다른 런던 여행기 재밌게 봐주시고요. 런던 이야기는 또 다른 에피소드가 1~2편 정도 더 나올 예정입니다. (시기는 미정)
손흥민 득점을 직접 직관한 이야기는 아래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