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여행 필수품

너무 반짝반짝 눈이 부셔

by 최재운

2015년 삼성전자 C-level 주관 T/F(Task Force)에 배속되어, 그룹 전 계열사 업무 책임자로 일하던 시절 이야기이다. 부사장 지시로 당장 실리콘밸리에 다녀오라는 오더를 받게 되었고, 바로 알아본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의 이코노미석은 이미 만석. 워낙 급한 업무였기에 회사는 과장급에게 비즈니스석을 끊어주며 미국으로 보내게 된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미국행이자, 첫 번째 비즈니스석 체험이었다.


당시 미국 방문은 나에게 많은 첫 경험을 안겨다 주었다. 처음 미국을 방문한다는 설렘은 과장 많이 보태서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Mayflower)를 타고 미국의 플리머스(Plymouth)에 발을 내딛는 심정과 흡사했다. 다만 첫 비즈니스석 경험은 허무하게 끝이 난다. 서비스와 기내식, 그리고 좌석의 안락함에 감동하였지만, 당시 과로에 찌들어 있던 상황이라 중간에 라면 요청도 하지 못하고 숙면에 빠져들게 되었고, 일어나 보니 샌프란시스코 상공이었다. 물론 비행기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지만.


미국 출발 전 심정은 이들과 같았으나, 피로에 찌들어 도착해 본 샌프란시스코는 이들이 본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첫 경험은 바로 해외에서 차량을 렌트한 것. 당시만 해도 막 초보운전을 벗어난 시점이었는데 출장 일정상 렌터카가 필수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같이 출장을 간 동료 역시 운전을 못 하는 상황. 울며 겨자 먹기로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차량을 렌트해 101번 고속도로를 직접 운전하여 산 호세(San Jose)에 있는 호텔로 향하게 된다. 첫 해외 운전이었지만, 구글 지도가 네비 역할을 잘해주었고 도요타 차량 역시 국내에서 운전해 본 차량들과 큰 차이가 없어 진땀을 조금 흘리긴 했지만, 숙소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오후에 도착하여 시차 적응이 안 되었을 법도 하지만, 비즈니스석에서 숙면을 취한 덕에 피로가 거의 없는 상황. 같이 출장 온 동료에게 바람 쐬러 갈까 물어봤지만, 방에서 쉰다고 하기에 혼자 겁도 없이 숙소를 나서 본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산 호세로 오면서 미국 운전에 익숙해졌다는 생각에 자신감도 충만하다. 그렇게 혼자 운전대에 앉아 목적지로 출발한다.


당시 이동경로 및 운전한 고속도로 스트릿 뷰(구글 지도)


하지만 일생일대 위기가 발생한다. 위의 경로처럼 산 호세에서 목적지까지는 동에서 서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위의 고속도로 뷰와 같이 전방은 완전히 탁 트여 있는 상황. 게다가 시간은 늦은 오후를 지나 저녁 시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여기서 뭔가 느껴지시는 분은 없는가?


차량은 서쪽으로 이동하고, 태양도 서쪽으로 지고 있는 상황. 하지만 차량 전방을 막아줄 시설물이나 산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 빌딩과 산이 시야를 막아 지평선이 보이는 경우가 없지만, 미국 서부 지역은 평지로 이뤄져 있고, 고속도로는 사방이 트여있다.


즉, 태양이 내 눈앞에 있다는 말이다!



드래곤볼의 장면과 같이 태양이 내 눈앞에 바로 위치하고 있었다.



예전 여행 포스트들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해외여행을 갈 때면 늘 선글라스를 챙기곤 했다. 하지만, 출장지에서는 선글라스가 필요 없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워낙 급하게 떠났던 출장이라 깜박하기도 했다. 어쨌든 선글라스는 없는 상황이고, 태양은 내 눈앞에서 빛나고 있다. 차량에 설치된 선바이저(Sun Visor, 앞 유리에 설치된 햇빛 가리개)를 내려보지만, 선바이저 밑에서 해님이 방긋 웃고 있는 상황.


그렇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겨우 실눈을 떠가며 위험천만한 운전을 이어갔고, 양손 가득 진땀을 흘리며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글을 쓰는 와중에도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섬뜩하기만 하다.


출장 첫날,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선글라스가 없어 자칫 위험할 뻔한 운전을 하며 찾아간 목적지는 과연 어디였을까?





당시 찍은 스탠퍼드 캠퍼스 모습


바로 스탠퍼드 대학(Stanford University)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세계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로 당시 출장을 간 실리콘밸리와 산호세, 샌프란시스코와 인접한 대학으로, 실리콘밸리의 근간이 되는 곳이다.


당시 부사장의 지시로 실리콘밸리를 둘러봐야 할 임무를 안고 미국에 오게 되었지만, 나의 직속 상사였던 부장님께서는 회사 업무와는 별도의 미션 하나를 더 내렸다. 바로 스탠퍼드 대학을 둘러보고 오라는 것.


스탠퍼드에서 유학 생활을 하셨던 부장님은 나에게 인간적으로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단순 직장 상사로서 업무만 이야기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커리어 전반적인 관점에서 나아갈 방향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셨다. 그 부장님께서 늘 하셨던 말씀.


얼른 퇴사해!


학교에서 10년 넘게 공부하고, 삼성전자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등바등 사는 모습이 부장님께는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하루라도 젊을 때,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견문을 넓혀,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지 말고 다양한 가능성을 시험해 보라며 퇴사를 종용하곤 했다. 그러면서 실리콘밸리 출장을 가는 나에게 반드시 스탠퍼드에 들려볼 것을 '지시'하셨다. 새로운 환경을 접하게 되면 눈이 뜨이며 어디든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리라는 것이 당시 부장님 논리였다.


하지만 이미 삼성전자가 주는 보너스인 PS의 달콤한 유혹에 홀딱 넘어가 있었기에, 부장님 말씀을 한 귀에 듣고 한 귀에 흘리고 있었다. 스탠퍼드 방문도 잔소리를 면피하기 위해 반강제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렇기에 넓디넓은 스탠퍼드 캠퍼스는 그저 관광지 중 하나로 다가왔다. 여의도 4배 사이즈에 달하는 크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들이 고즈넉하게 있는 모습은 여기가 대학인지 중세 수도원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위치한 야자나무와 넓은 잔디밭은 리조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심지어 로댕의 조각상들이 예술품이 아닌 것처럼 툭 던져져 있는 것도 매력 포인트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당시 업무에 치여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쁘던 나에게 스탠퍼드는 그냥 멋진 대학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삼성전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된 연구자로 자리 잡은 지금에서 돌아보면 스탠퍼드 방문이 삶에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오랜 회사 생활에 지쳐 활로를 찾아 이직한 것일 수도 있고, 회사의 부속품에 머물고 싶지 않아 독립을 꿈꾸며 퇴사를 한 것 같기도 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시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스탠퍼드 방문이, 진로 선택에 있어 어떻게든 영향을 주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당시 스탠퍼드에서 기념품으로 구매한 스타벅스 머그잔은 여전히 책상 위에서 당시 경험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퇴사하게 된 시발점이 여기 아니었냐고 알려주듯이 말이다.



스탠퍼드 근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며 함께 구매한 머그컵 (당시 갤럭시는 손떨림 보정 기능이 없....)



아, 그리고 글의 서두로 다시 돌아와서,

미국 서부를 여행한다면,

특히 운전을 계획하고 있다면,

선글라스는 반드시 챙기세요!




오늘은 여행 이야기도 출장 이야기도 아닌, 개인적인 이야기를 여행담에 녹여 풀어보았습니다. 홍콩에서 출발해, 로마와 런던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야기 역시 2~3편 정도 추가 업로드 예정입니다. 물론 그전에 다른 곳을 들렀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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