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역설과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찰
만약 그가 악을 없애길 원하지만 그것을 할 수 없다면 그는 무력하다. 이것은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신이 악을 없앨 수 있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의적인 것이다. 신에게 적절치 않다.
만일 신이 악을 없애길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면 그는 악의적이고 무력하다. 신이라고 할 수 없다.
신이 악을 없앨 수도 있고 그것을 원하기도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신에 합당한 일이지만....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왜 신은 악을 없애지 않는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와 세상의 악을 둘러싼 딜레마를 제시하며, 이를 통해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의 개념에 의문을 던졌다. 이 논증은 후에 "에피쿠로스의 역설"로 알려졌다. 그 핵심은 단순하다.
만약 신이 전능하고 선하다면, 세상에 악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악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네 가지 가능성 중 하나가 성립한다.
1. 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다.
2.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다면, 그는 선하지 않다.
3. 신이 악을 막을 능력과 의지를 모두 갖고 있다면, 왜 이 세상의 악이 존재하는가?
4.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면, 왜 우리가 그를 신으로 부르는가?
3세기 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 락탄티우스의 저서에 등장하는 이 논증은 에피쿠로스가 한 말로 전해지지만, 실제로 그가 직접 남긴 것인지에 대해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당시 에피쿠로스는 무신론자로 여겨졌으며, 이 역설 역시 무신론자의 대표적인 논리로 종교와 신의 개념을 비판하는 데 자주 인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 논리의 타당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배경에 얽매이지 않고, 이 논증이 제기하는 신의 속성과 악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도록 하자.
세상에는 고통과 불행, 폭력과 부조리가 넘쳐난다. 전염병, 전쟁, 자연재해 같은 재앙들은 이유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인간 사회 내에서도 끊임없이 불의와 악행이 반복된다. 신을 믿는 이들은 이런 고통 속에서도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그 신이 사랑과 정의의 화신이자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악의 문제는 그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만약 신이 정말 존재하고 전능하며 선하다면, 왜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하면서도 악을 허용하는 상황은 신의 존재 이유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변명 삼아 악을 방치하거나, 고통이 신의 계획에 포함되었다는 설명은 얼토당토않은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실제적인 고통 앞에서 이런 변명들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먼저, 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신이 선한 존재임을 인정하지만, 그에게는 악을 막을 수 있는 전능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런 경우 신은 단지 동정 어린 마음만 지니고 있을 뿐, 고통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한 존재가 신이라 불릴 자격이 있을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전지전능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신의 정의다. 하지만 악을 막지 못하는 무능한 신은 우리가 기대하는 전지전능의 신과 거리가 멀다. 결국, 이 신은 인간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방치하는 무기력한 관찰자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전염병을 극복하고, 불의를 없애며, 서로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그럼에도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이 부조리를 더욱 부각시킨다. 고통을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이라면, 그러한 신을 두고 경배할 이유는 없다.
이번에는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신이 전능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통과 불행을 방관하거나 심지어 허용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우리는 신의 도덕적 선함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이 겪는 고통을 한순간에 없앨 수 있음에도, 이를 외면하거나 의도적으로 방치한다면 그러한 신은 결코 선한 존재라 부를 수 없다. 단순히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하는 것은 잔혹함에 가깝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구하지 않고 방관하는 자와 같다. 그 자가 어떤 이유로든 돕지 않는다면, 그를 결코 선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고통과 악을 허용하는 신이 인간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거나 더 큰 계획의 일부라 변명한다면, 그 계획 자체가 처음부터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고통을 의도적으로 방치하는 신은 사랑과 정의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불의의 화신에 가까우며,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서도 경배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당연히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고통, 불의, 재난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는 신의 존재와 속성 사이에 심각한 모순을 드러낸다. 만약 신이 악을 막을 의지와 능력 모두를 지니고 있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인간의 자유 의지나 원죄를 이유로 드는 전형적인 신학적 변명은 그 자체로 문제가 많다. 인간의 선택에 의해 악이 발생한다고 해도,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처음부터 악이 발생하지 않도록 설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신은 불완전한 세상을 일부러 만들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더 나아가, 자연재해와 같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악은 도저히 자유 의지로 설명될 수 없다. 홍수, 지진, 태풍 같은 재앙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이와 같은 고통이 아무런 이유 없이 허용된다면 신의 선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사 신이 더 큰 선을 위해 악을 허용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인간에게 그 선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이는 합리적 정당화가 될 수 없다. 결국 악이 존재하는 현실은 신이 전능하고 선하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부정한다. 악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모순적인 가정일 뿐이며, 이러한 믿음은 단지 현실을 외면하려는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신은 아무런 능력도, 선함도 지니지 않은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신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신이 고통과 불의를 막을 능력도 없고, 이를 막으려는 의지조차 없다면, 사실상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존재로 취급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신은 인간의 도덕적 삶에 아무런 기준도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가 보통 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정의와 사랑의 상징으로서 세상을 바르게 이끄는 역할인데, 악을 막지 못하고자 하는 신은 아무런 도덕적 권위도 갖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고통과 불행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신의 전능함과 선함을 전제로 한 종교적 믿음은 세상의 악과 고통 앞에서 논리적 모순을 드러낸다. 신이 악을 막을 의지나 능력 중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우리는 그를 신이라 부를 이유를 찾기 어렵고,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면 악의 존재 자체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처럼 악의 문제는 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무신론자의 시각에서는 세상의 고통과 불의가 단순히 인간과 자연의 결과일 뿐,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의 개입이나 계획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역할이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무능한 신의 존재는 수많은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신이 전능하지 않고 세상의 악과 고통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신에게서 위안과 희망을 찾았다. 완벽하지 않은 신일지라도, 고통 속에서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존재는 여전히 가치가 있다. 신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절대자가 아니더라도,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상징으로 작용하며 사람들에게 어려운 순간을 견디게 할 힘을 주었다. 인간은 때로 논리와 이성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시련에 직면하며, 그때 결과와 상관없이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로가 된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전능한 신이 아닌, 그저 우리 곁에 있다고 믿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모든 논리와 비판을 떠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연약한 존재다. 세상의 고통과 혼란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그 순간마다 무언가 기댈 곳을 찾게 된다. 종교는 그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신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힘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배당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고, 기도 속에서 스스로를 다잡는 경험은 많은 이들에게 생존을 위한 정신적 버팀목이 된다.
종교는 단지 신에 대한 믿음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연대감을 통해 고립된 개인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삶이 부조리하고 답을 찾을 수 없는 순간, 누군가가 곁에서 손을 잡고 "괜찮다"라고 말해줄 때 우리는 비로소 조금 더 버틸 수 있다. 종교가 바로 그러한 손길을 제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때로는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에 기댈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인 면일지도 모른다.
비록 신의 존재가 모순되더라도, 종교는 우리가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탈출구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나는 종교를 쉽게 부정하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고통 속에서 종교는 여전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작은 희망으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가진 위로의 역할은 부정하기 어렵다. 논리와 이성만으로는 인간이 겪는 고통을 모두 설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으며, 우리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마음 둘 곳을 필요로 한다. 종교는 그 공간을 제공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견디게 하는 정신적 안식처가 된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더라도, 종교의 가치는 단순한 진리 추구를 넘어 인간적인 위안과 연대에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는 비록 논리적으로 완벽하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감정적·사회적 도구로 남아 있다. 우리는 신을 믿지 않아도 괜찮고, 신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종교가 주는 희망과 위로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만으로도 종교는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이 글은 개인의 철학적 의견을 담은 짧은 글일 뿐이며, 특정 신념이나 종교를 비하하거나 논쟁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신의 존재와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여러 관점이 드러날 수 있겠지만, 이 글은 단지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종교는 각자의 신념을 담고 있기에 누구의 믿음도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