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밝은꽃쌤 Sep 15. 2019

가장 유능한 변호사, 엄마

마지막 순간까지 한 영혼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수호천사

  몇 년 전, 개인적인 이유로 소송을 건 적이 있다. 형사였으면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민사였다. 원고인 나는 혈혈단신 혼자 갔는데 피고 측은 항상 엄마와 함께 나타났다. 30대 성인이 늘 ‘엄마’를 끼고 와서 둘이 함께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게 나는 참 당황스러웠었다. 결국 게 "모든 잘못과 책임이 있으면서 왜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냐!" 고 호통며 꾸짖는 판사님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이 불편한 느낌이 나 혼자만의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17년 가을, 전북교육연수원의 ‘연수한마당’에서 <지연된 정의>저자인 박상규 기자님의 강의를 들었다. <지연된 정의>는 영화 <재심>의 원작 격 되는 책이다. 익산 약촌 오거리 살인 사건 등 이 책에서 다뤄지는 억울한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느냐는 기자님의 질문에 잠시 궁리를 해보았다.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가 없고, (그래서) 한글 문해력이 없는, 경계선급 지적 장애인’

이 그 답이었다. 순간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 자신의 아들 원빈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 쓰고 경찰에 잡혀들어간 지적장애인을 보며

“너 엄마 없니? 너 엄마 없냐고?”

 라고 외치던 엄마 김혜자가 떠올랐고, 상규 기자님도 바로 이어 그 장면을 들어 부연 설명하셨다. 나 역시 영화를 보다 그 장면에서

‘봉준호는 여자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대사를 쓸 수 있지?’

하며 소름 돋았던 그 때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 당시 봉준호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영화 <마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로 저 말을 꼽았던 것 지금까지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상규 기자님은 덧붙이셨다.

“한 예비 범죄자의 무죄를 가장 잘 입증해내는 사람은 그 사람의 엄마입니다. 그 어떤 베테랑 경찰도, 노련한 변호사도, 피고인의 엄마를, 그녀의 수사력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경찰서나 법정에 가면 가장 씩씩거리며 열 올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 피고인의 엄마입니다.”

  이 말까지 듣고서야 나는 수년전 나의 피고인과 그의 엄마를 떠올렸다. 마음이 풀어지진 못했지만, 조금이나마 머리로 이해는 해줄 수 있었다.     


 

  요즘 나는 ‘한 사람의 가장 강력한 수호천사’인 엄마라는 존재의 위력을 느끼고 있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이 말하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미묘한 눈빛과 성량, 말투에 울고 웃는 그녀들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 위대해 보이기도 한다.

  자녀에 대해 너무도 명백한 사실들(나의 주관적 판단이나 해석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발생했던 사실만 말씀 드리는데도)을 받아들이지 못해 화를 내거나,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화가 난다.


또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고 공감도 된다. 우리반 아이들, 아니 하다못해 내 수업, 나의 교실, 환경 정리, 내가 쓴 글 하나 지적 당해도 속이 아린데 8년 세월 품고 가꿔온 내 삶의 가장 확실한 흔적이자 업적(?), 분신과도 같은 내 자식에 대해 직언을 듣는 마음은 감히 수업 협의회나 ‘찾아오는’ 환경 정리 컨설팅(?), 글쓰기 합평에서 받은 충격과 상처의 쓰라림 따위에 비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있었던 사실을 전달만 했을 뿐인 1학년 담임교사에게 고성이나 폭언을 하시거나, 얽히고설킨 진실공방과 삼자대면 끝에 내 자식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그 화를 참지 못하고 교육청에 전화를 해, 없는 말 지어 하시며 애먼 화풀이를 하시면 담임교사는 너무 곤혹스럽다. (현재, 이 모든 일들은 원만히 해결되었다. 학부모님은 무고죄를 인정하시고 사과하셨고, 그 뒤로 우리는 오히려 신뢰 관계를 쌓아 지금까지 그 학생 지도를 위해 서로 협조하고 있다. 일단 내 생각은 이렇다.)


  직언하는 내 마음도 아프다. 그 직언을 하기까지 교실에서,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수없이 많은 사건을 일으킨 그 아이를 돌보느라 나 역시 심신이 지쳤는데, 좋은 반응 나올리 없는 말을 또 입에 담아야 하는 이 심정도 헤아려달라고는 차마 말씀 드리기 어렵다. 먼저 생각해주시면 감사할 뿐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며 눈물을 흘리시거나 오열하시는 분을 만나면 안쓰럽다. 드물지만 담임교사의 말을 담담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가정에서 자녀 지도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분들은 참으로 대단해 보인다.

내가 엄마가 되어도 저렇게 객관적으로 담임교사의 말을 수용할 수 있을까? 내 자식이 이 세상살이에 부적합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충격과 슬픔을 견뎌낼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럴 리 없다고, 주변 친구 잘못이라고, 선생님께서 오해하시는 거 아니냐고, 왜 내 자식을 미워하시냐고, 더 예쁘게 봐주시고 더 사랑해주시라고, 나 역시 단번에 입 밖으로 토해낼 것만 같다.

  어머님들 나가신 빈 교실에 홀로 남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역시 억울하고 슬프고 화가 날 것만 같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다. 직시하고 인정하는 순간 지나온 내 삶이 뿌리채 흔들릴 것만 같은 힘겨운 팩트(fact).    



  

  6월13일에 썼던 글인데 100일 정도 묵혀두니 밖으로 꺼내보일 용기가 나 이제야 올려본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맥락과 함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자, 같은 뜻인 듯 같은 뜻이 아닌 두 단어 ‘어머니’와 ‘엄마’ 중, 나는 ‘엄마’를 골랐다.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니 4년 전 나의 피고인의 엄마는 법원에서 만나기 몇 달 전, 내 앞에서 목 놓아 울면서 말 했었다.

“이 죽일 놈의 새끼가, 왜 그런 잘못을 해가지고, 내 새끼가 잘못했는데…… 잘못 한 게 맞는데……. 그래도 어쩌겠냐, 내 아들이니 나는 내 자식 편을 들어야지. 내가 그 편을 안들어 주면 누가 걔 편을 들어주겠냐."    


  ‘사랑’이라는 말과 ‘모정(母情)’이라는 말 앞에 ‘옳은’과 ‘바른’ 이란 형용사를 둘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 형용사들로 저 두 추상명사를 꾸미는 게 ‘옳고’ ‘바른’ 것인지, 하다못해 ‘적합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모르고 살면 세상 모든 것은 너무도 쉬운데, 알면 알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세상엔 어려운 게 너무도 많다.

 

이전 11화 선생님, 안아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