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나를 위한 시간의 시작

퇴직 후 3년이 지나도 좌충우돌 하는 사회적응기

퇴직한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어색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시계부터 본다. 몇 시에 일어나든 상관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몸은 아직도 30년간의 루틴을 기억하고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7시 15분. 예전 같으면 세수를 하고 출근 준비를 했을 시간이다. 이제는 천천히 커피를 내려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동네 산책을 나서면서도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직도 완전한 일반인이 되지 못한 것 같다.


퇴직을 앞두고 있을 때만 해도 막막했다. 직장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좋겠다, 매일이 일요일이네"라고 말했지만, 정작 내 마음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규칙적인 삶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이 갑작스러운 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첫 주는 정말 어색했다. 아침 7시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데 갈 곳이 없었다. 평소 즐겨보던 뉴스도 다르게 느껴졌다. 경제 뉴스를 보면서도 예전처럼 절박하지 않았고, 정치 뉴스도 한 발짝 떨어진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 이게 바로 현역에서 물러난다는 것의 의미구나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동네 도서관을 들렀다. 평일 오전 도서관은 조용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고, 직장인들은 회사에 간 시간이었다. 독서실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몇몇 앉아 있었다.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문학 코너로 향했다. 대학생 때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들이 이제는 다르게 다가왔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퇴직이란 바로 내가 30년간 살아온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로 태어나는 과정이었구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축하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월요일과 목요일은 헬스장에서 운동을, 화요일과 금요일은 도서관에서 독서를, 수요일은 동네 문화센터에서 하는 서예 강좌에 참여하기로 했다. 주말에는 근교로 여행을 다니거나 오랫동안 미뤄둔 집안일을 처리했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직장에서 만나던 사람들과는 점점 멀어지는 대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헬스장에서 만난 김 선배는 나보다 5년 먼저 퇴직한 분이었다. 그분은 퇴직 후 텃밭을 가꾸며 지낸다고 했다. "처음엔 심심해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이게 내 천직인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분의 얼굴에서 평안함과 만족감을 읽을 수 있었다.


서예 강좌에서 만난 박 아주머니는 환갑이 넘어서 서예를 시작했다고 했다. "평생 남편과 아이들만 돌보며 살았는데, 이제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설렘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퇴직 후의 삶은 결코 쇠퇴나 은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동안 억눌려 있던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직장 생활 동안에는 회사의 목표가 내 목표였고, 회사의 성과가 내 성과였다. 하지만 이제는 온전히 내 기준으로, 내 속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나는 매일 일기를 쓴다. 별일 없는 하루라도 적어보면 의미가 있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왈칵 눈물이 났다. 나이 들어서 읽는 소설이 이렇게 가슴에 와 닿을 줄 몰랐다." 이런 소소한 기록들이 쌓여가면서, 내 인생의 후반부가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물론 모든 것이 장밋빛인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부담감도 있고, 가끔은 사회에서 멀어진 듯한 소외감도 느낀다. 뉴스에서 나오는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말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맞추느라 바빴던 지난날들과는 다른, 내 속도로 사는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 멘토링이나 강의 같은 것 말이다. 또한 언젠가는 내가 경험한 퇴직 후의 삶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을 두려워하는데, 사실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기대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퇴직 3년, 나는 확신한다. 인생은 60세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60세에 다시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동안 남의 꿈을 이루느라 바빴다면, 이제부터는 내 꿈을 이룰 차례다. 매일이 새롭고, 매일이 설렌다. 이것이 바로 제2의 인생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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