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각난 시간 속에서 헤매이는 영혼

57세에 갇힌 30살의 기억

요양원 복도 끝, 창가에 자리 잡은 방의 주인.

이곳에 온 지 한 달, 그녀는 이제 이 공간의 일부가 되었다.미색 벽지의 작은 방, 단조로운 가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여전히 빛나는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창가에 앉아 햇살을 받으면 그녀의 얼굴은 참 곱다. 주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젊은 날의 흔적이 아직도 선명하다. 문득 시선이 마주치면 그녀는 언제나 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미소는 이곳의 차가운 공기를 따스하게 데워준다


가끔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건네기도 한다. "드세요, 달아요." 그녀의 손길에는 언제나 나눔의 온기가 묻어있다. 비록 그 사탕이 주름진 휴지 조각일 때도 있지만, 그 마음만은 순수하다.

"어르신, 많이 드셨어요?" "선생님,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그녀의 말투에는 항상 정중함이 깃들어 있다. 삶의 무게와 세월이 그녀에게서 빼앗아 간 것들이 많아도, 품위만큼은 앗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식사 시간이 되면 그녀의 손은 숟가락을 어떻게 쥐어야 할지 망설인다. 밥을 입으로 가져가는 단순한 동작조차 이제는 낯선 여행이 되어버렸다. 때로는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들고, 때로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밤이 깊어지면 그녀는 자신의 방을 찾아 복도를 헤맨다. "화장실은 어디인가요?" 라고 물으며 부엌으로 향하기도 한다. 소변이 마려울 때는 소파 위에 앉아 해결하려 한다. 공간의 경계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무너져 내린 지 오래다.

식판 위에 놓인 밥과 반찬 사이의 구분도 이제는 그녀에게 의미가 없다.

김치를 커피에 담그기도 하고, 국을 디저트처럼 마지막에 먹으려 한다. 맛의 질서가 뒤섞인 세상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적응해 간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빛에는 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서려 있다.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그녀는 매 순간이 새로운 공포와의 대면이다. "제 방은 어디인가요?" "집에 가고 싶어요." 그 목소리에 담긴 떨림은 길 잃은 아이의 울음소리처럼 가슴을 저민다.

이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의아해할 것이다."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한 때는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었고, 아내였던 여인이 이제는 자신의 삶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무엇이 그리 고운 그녀를무엇이 아직은 젊은 나이의 그녀를 망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을까?

겨우 57세, 아직 노년이라 부르기엔 이른 나이 결혼은 했으나 자식도 남편도 곁에 없이오직 조카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오게 된 그녀.

의사는 '조기 치매'라 했지만, 그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한 인생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른다.


모두가 잠든 밤그녀의 방황은 또다시 시작된다.

"어르신, 여기가 어디예요?" 부엌으로 들어서며 묻는 그녀."어르신, 방으로 들어가세요. 거긴 왜 들어가세요?""소변 보려구요." "어르신, 기저귀에 보시면 돼요.""제가 무슨 기저귀를 찼어요?" 기저귀를 차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녀.그녀는 자신을 돌보는 이들마저 '어르신'이라 부른다. 방으로 안내하고 침대에 눕혀드리고

나오지만 곧바로 따라 나오는 그녀.

"아니, 그런데 여기 계시던 어르신들은 다 어디 가셨어요?" "다 주무시잖아요. 어르신도 들어가시게요." 침대에 다시 눕혀드리고 이불을 덮어드리고 나온다. 하지만 다시 따라 나오는 그녀, 이번엔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어르신, 왜 그러세요? 어르신 방으로 들어가시게요.""내 방이 어디예요? 내 방을 못 찾겠어요. 우리 조카한테 미안해요.""조카 이름이 뭐예요?" "철수예요." "무엇이 미안한데요?" "이것저것 다 해주니까 미안하죠.""어르신, 나이가 몇 살이에요?" "30살이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녀의 눈빛이 갑자기 반짝인다.

"오늘 결혼기념일이에요. 남편이 꽃을 사 올 거예요."

갑자기 목소리가 달라진다. 쑥스러운 듯 볼을 붉히며 속삭이듯 말한다.

"우리 남편 준석이, 처음 만났을 때 커피를 쏟아서 제 원피스를 망쳤어요. 그 날 사과한다고 저녁을 사주더라고요. 참... 수줍어하던 모습이 귀여웠어요."

잠시 침묵 후, 그녀는 자신의 왼손 약지를 바라본다. 반지는 없다.

"준석이가 프러포즈할 때 바닷가에서 무릎 꿇었는데, 파도가 와서 젖었어요.그래도 그대로 반지를 끼워주더라고요. 우리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요. 늦으면 안 되는데..."

문득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되묻는다. "여기가 어디죠? 준석이는 어디 있어요?" 가슴 한구석이 뜨거운 물결로 차오른다.

이 고운 여인은 어찌하여 이리 되었을까?

57세의 몸에 갇힌 30살의 기억.

조각난 시간 속에서 헤매는 영혼.

그녀의 남편 준석씨는 8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후로 그녀의 기억은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고,마침내 30살, 사랑이 가득했던 그 시절에 멈춰버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녀는 겨우 잠이 들었다. 부디 꿈속에서는 예쁜 원피스 입고 예쁘게 화장하고 사랑하는 사람 손 잡고 환하게 웃길 기도하며 붉은 태양을 맞이한다.


다시 시작된 하루그녀는 어김없이 일번으로 나와서 여기저기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식사 시간... "어르신, 식사하시게요." "네." 하고 자리에 앉지만 30초도 되지 않아 바로 일어난다. "어르신, 앉아서 식사하시게요." "네." 숟가락에 밥을 떠서 그녀의 손에 쥐어주며,"어르신, 밥이에요. 드셔보세요." 그녀는 숟가락에 있는 밥을 손가락으로 집는다."어르신, 그게 아니고 숟가락을 입으로 넣어서 드세요."

수차례 시도 끝에 식사를 진행한다.

"어르신, 나만 먹으니까 미안하네요. 난 그만 먹을 거니까 다른 어르신 드리세요.""어르신, 이건 어르신 밥이에요. 다 드시게요." "그래요. 그래도 미안한데요."

이렇게 그녀의 하루 세끼는 마무리된다.


신은 있는가?있다면 왜? 왜?

하루에도 수십 번 외쳐보지만 답변은 듣지 못한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사명이라는 단어. 신 앞에 나아가기를 멈춘 지 오래.

눈물 속에 원했던 사명, 그것일까? 신은 잊지 않고 그토록 내가 원했던 사명을 이리 주시는 걸까? 많이 버겁고 버겁다.내가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힘과 방법을 주실 거라 생각한다.이 척박함 속에 나를 두시는 신의 뜻이 있겠지.이 척박함 속에 나의 두 손을 담그시는 신의 뜻이 있겠지.

허다한 모든 것은 사랑이면 족하다 했는가? 사랑! 답이겠지. 하지만 그 사랑이 힘들다.신께 구하리라.

하얀 눈꽃이 내리는 밤, 소곤대는 꽃소리 반주 삼아 노래하고 싶다.외롭고 고독한 밤이다.

창밖으로 어둠이 깊어질 때, 나는 그녀의 방을 마지막으로 들여다 본다. 흐릿한 조명 아래 평온히 잠든 그녀의 얼굴은 마치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잊은 듯하다.

우리는 모두 결국 빈 몸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사랑을 나누고 있다.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도,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이 차가운 공간을 따뜻하게 데운다.


어쩌면 우리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뿐일지도 모른다. 숟가락 사용법도,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그녀의 따스한 손길은 여전히 사랑을 베풀고 있으니. 오늘 식당에서 만난 새로운 입소자. 밥도 먹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참고 있었다.모두가 외면할 때, 그녀만이 다가가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어르신. 곧 익숙해질 거예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기억이 아닌 사랑에 있다는 것을. 이 처절한 현실 속에서도 우울한 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그녀의 모습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보았다.

내일도 나는 그녀의 방을 찾아갈 것이다. 그녀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이니까.

"하루 하루가 선물입니다." 요양보호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던 날, 동료가 내게 했던 말이다.

지금 이 순간,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한다.

신이여, 이 고된 일상 속에서도 사랑을 나누는 법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녀처럼 모든 것을 잊게 될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기를.


그녀의 계절/보헤미안(박지수)

조각난 기억의 강물 위에

그녀는 오늘도 흘러간다

쉰일곱 봄을 지나온 꽃이

시든 듯 보여도 여전히 곱다

숟가락을 잊어버린 손끝에는

아직 삼십의 청춘이 머물고

찾지 못하는 방문 앞에서

어제의 웃음이 아른거린다

눈부신 햇살 아래 누군가의 딸이었고

푸른 달빛 아래 누군가의 아내였던

그녀의 세상이 흐려질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방 저 방 헤매는 발걸음마다

그녀가 지나온 인생이 묻어나고

높임말로 건네는 미소 속에

지워지지 않는 품격이 서려 있다

요양원 창가에 내리는 첫 눈처럼

그녀의 마음에도 봄날이 오기를

나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도

그녀의 꿈은 따뜻하기를

오늘 밤은 별빛 한 자락 베개 삼아

그녀가 기억하는 모든 아름다움이

조용히 찾아와 안아주기를

내일은 좀 더 밝은 눈빛으로 웃기를

keyword
이전 01화사랑의 빵 한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