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여 시간동안 1인용 침대에 누워 5남매의 자식을 기다리던 엄마는 가고
그곳은 박정순 할머님의 자리였습니다. 아들 다섯을 키워내신 할머님은
늘 창밖을 바라보시며 누군가를 기다리셨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같이 창가를 바라 보고 면회객들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셨죠.
"우리 막내가 올 거야. 어제 전화했거든..."간혹 그렇게 중얼거리시곤 했지만, 실은 2년 동안 전화 한 통 없었습니다. 오직 큰아들만이 한 달에 한 번, 십 분 남짓 들렀다 갈 뿐이었죠.
비위관으로 영양을 공급 받으시면서도, 할머님은 늘 식사 시간이면 입술을 달싹이셨습니다. "이제 곧 나가서 아들들한테 밥해줘야 하는데..." 그 말씀을 하실 때면, 할머님의 주름진 손가락이 이불을 꼭 쥐었다 폈다 하곤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창밖을 향해 있던 할머님의 눈빛이 서서히 흐려졌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쳐 잠드신 것처럼 고요했습니다.
큰아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습니다. 텅 빈 침상 앞에 선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면회 때 어머님이 그의 손을 꼭 잡고 "아들..." 하고 부르시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을까요.
"어머니... 죄송합니다..."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적막한 병실을 가르고, 이내 훌쩍이는 소리로 바뀌었습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는 어머님이 누워계시던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른 형제들한테 연락도 제대로 안 했어요... 바쁘다고... 어머니 보러 같이 가자고 한 번도 제대로 말 못했어요..." 제게 하는 말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미 떠나버린 어머님께 하는 고백이었을까요.
창가에 걸린 달력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습니다.
지난 2년간 할머님이 손수 적어두신 날짜들이 보였습니다. 아들들 생일과 손주들 생일까지, 빼곡하게 적혀있는 날짜들 옆에는 작은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면회를 기다리시며 하루하루 체크하신 흔적이었겠지요.
큰아들의 어깨가 떨렸습니다. 이제야 알게 된 어머님의 기다림이, 그 소리 없는 호소가 가슴을 파고드는 걸까요.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후회는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그의 등을 쓸어내릴 뿐이었습니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면회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 달에 한 번이었던 그 짧은 만남이, 어머님께는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었을까요. 하지만 이제 303호 창가에는 더 이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머님의 모습이 없습니다.
저는 매일 이런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치매'라는 진단명 하나로 부모님을 시설에 맡기고, 바쁘다는 핑계로 발걸음을 끊어버리는 자식들의 모습을. 어르신들은 비록 기억은 흐려져도 그리움만큼은 선명히 간직하고 계신데, 우리는 그 마음조차 잊은 채 살아갑니다.
오늘도 수많은 어르신들이 요양원 창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입니다. 부모를 모시는 것이 더 이상 '효'가 아닌 '부담'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이 부끄러워집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이든다는 이유로, 기억이 흐려진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존재마저 희미하게 지워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정순 할머님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다짐합니다. 우리 모두의 부모님이 될 수 있는 이분들의 마지막 나날이, 더는 이렇게 차갑고 외롭지 않기를. 적어도 저는, 이곳에 계신 한 분 한 분의 기다림에 더 따뜻한 손길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