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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눈이 내리는 날의 약속

93세의 치매노인에게도 하얀눈은 설레임이었다

"100*98이 숫자가 무엇일까요?

100센티미터 곱하기 98센티미터,요양원의 1인용 침대 크기입니다.그들이 입소하는 순간부터 퇴원하거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머무르는 단 하나뿐인 자신만의 공간.

평생을 살아온 넓은 세상이 이제는 이 작은 사각형 안으로 좁혀졌습니다.그 안에 고이 접어둔 사계절 옷가지들, 그리워하는 가족의 사진들,그리고 매일 밤 읊조리는 기도문까지.인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창밖에 폭설이 내리는 하루, 평소와는 다른 고요함이 병동을 감쌉니다.밤새 기저귀를 만지작거리며 안절부절못하던 할머니도, 죽음을 이야기하며 불안해하던 할아버지도 오늘만큼은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운 얼굴입니다.하얗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눈빛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아왔습니다.


"선생님, 눈이 오네요. 행복해요."

주름진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봄날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저는 눈이 참 좋아요."떨리는 목소리에 담긴 설렘이 젊은 날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나가볼까요?"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제안을 하면서도가슴 한켠이 아려옵니다. 하지만

어르신은 오히려 저를 위로하듯 두 손을 들어 올리시며"그래요, 선생님이랑 눈싸움해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으십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송이들은 여전히 마법 같은 힘을 가졌나 봅니다. 잠시나마 치매라는 무거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그들의 상한 영혼에 작은 기쁨을 선물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눈 내리는 거리에서 첫사랑과 나눈 설렘이,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았던 벅찬 행복이, 사랑하는 이와 보낸 겨울밤의 따스함이 희미한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라벤더1.jpg

그저 좋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치매라는 덫에서 벗어나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하얀 눈이 내리는 오늘만큼은 그들의 마음에도 포근한 평화가 쌓이기를.

걸어온 긴 세월 속 당신에게 찾아왔던 천사들이 오늘 다시 한번 찾아와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처럼 당신의 하루를 행복으로 채우기를.

"어떤 인연으로 당신과 제가 만났는지,이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굳게 약속드립니다.

당신들의 힘겨운 나날들을, 말하지 못해 삼키는 고통들을, 홀로 견뎌내는 외로운 밤들을 세상에 알리는 작은 등불이 되겠습니다.

꺼져가는 당신의 영혼이 차가운 병실에서 시들어가지 않도록 제 온기를 나누어 따뜻하게 안아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숨결까지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끝내 떠나는 순간에도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제 진심을 다해 곁을 지키겠습니다.

이것이 우연히 만난 당신께 드리는 저의 가장 간절하고 소중한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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