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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잠바의 여인

105세 치매 노인의 요양원에서의 하루

시간 너머의 목소리

그녀는 105세. 빨간 잠바와 멋진 모자, 그것이 그녀의 전부이자 세상이다. "오늘도 예쁘게 차려입어야 해. 누가 올지 모르니까."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매일 기다림을 차려입는다.

그녀의 걸음은 시간의 무게를 이기려는 춤사위. 수줍은 미소 뒤에 숨겨진 백 년의 이야기.

창가에 앉아 성경을 읽는 그녀의 손가락은 주름진 지도 위를 더듬는 여행자처럼 페이지를 넘긴다. "주님, 오늘도 그 아이를 지켜주세요." 기도는 그녀가 보내는 유일한 편지.

시계가 알려주는 경계

밤 9시, 시계의 초침이 그녀의 이성을 삼켜버리는 마법의 시간. 낮의 품위 있던 그녀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이곳은 감옥이야! 누가 날 가뒀어!" 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이 복도를 가득 채운다. 아무리 설명해도 들리지 않는 귀, 아무리 보여줘도 보이지 않는 눈.

그녀는 지팡이로 바닥을 쾅쾅 내리치며 돌아다닌다. "밥! 밥! 밥 내놔! 하루종일 굶겼어!" 방금 전 저녁을 먹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기억에서 완전히 증발했다. 누군가 말을 걸면 더욱 격렬해지는 분노.

그녀는 문을 발로 차고, 의자를 밀어버린다. 자신을 말리는 사람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위협한다. "내 동생이 검사야! 다 알아낼 거야! 니들 다 감옥 갈 거야!"

낮에는 상상할 수 없던 폭력성이 그녀의 몸을 지배한다. 때로는 다른 노인들의 방에 들어가 소지품을 뒤지기도 한다. "내 물건 어디 숨겼어? 도둑년들!"

이성적 설득은 불가능하다. 그녀의 눈은 현실과 다른 세계를 보고 있다. 그 세계에서 그녀는 불의의 피해자이고, 모두가 그녀를 속이고 굶주리게 하는 가해자다.

베지밀 한 모금의 마법

나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손에 따뜻한 베지밀을 건넨다. 우리의 손가락이 스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변한다. 분노의 파도가 잦아들고, 잔잔한 호수가 된다.

"아이고, 미안해요. 선생님도 드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속삭임처럼 부드럽다. 한 시간 전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우리는 말없이 마주 앉는다. 그녀는 조심스레 베지밀을 한 모금 마시고,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백 년의 세월을 읽는다.

"우리 선생님, 참 착해." 그녀의 주름진 손이 내 손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그 손길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이 담겨있다. 작은 베지밀 하나가 그녀에게는 화해의 제스처이자 사랑의 증표. 단순한 음료가 아닌, 그녀가 잊고 있던 인간적 교감. 그녀는 베지밀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내게 돌려준다. "내일을 위해 남겨둘게요." 그 말 속에는 '내일도 와 주세요'라는 부탁이 숨어있다. 방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외롭다. 빨간 잠바는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처럼 흔들린다.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날도 우리의 작은 의식은 계속될 것이다.

부재하는 딸의 그림자

"내 딸은 바빠요, 정말 바빠요." 같은 말을 백 번째 반복할 때도 그녀는 미소 짓는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숨어있다. 작은 액자 속, 젊은 여인의 사진을 매일 닦으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식을 보내고 살아남은 내가 잘못했을까?" 밤이면 그녀는 침대 끝에 앉아 혼잣말을 한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 벌인가 봐." "부모는 자식보다 먼저 가는 게 순리인데..."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살아 딸의 얼굴도 잊어가는지..." 한 번도 그 딸의 부재를 원망하지 않지만 스스로를 자책하는 그녀의 어깨는 밤마다 더 깊이 웅크린다. "딸아, 엄마가 빨리 갈게. 미안하다, 이렇게 오래 살아서."

요양원 직원들은 모른다. 그녀의 딸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안다. 그저 인정하지 않을 뿐. 차라리 바쁘다고 생각하는 게 견디기 쉬우니까. 그녀의 기억 속에서 딸은 영원히 살아있다. 그리고 그녀의 자책 속에서도 딸은 영원히 살아있다. "자식보다 오래 사는 것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 어디 있을까..."

흰 침대 위의 기도

밤이 깊어지면 그녀는 침대 위에 무릎을 꿇는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을 은빛으로 물들인다. 백 살이 넘은 그 무릎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모은다.

"주님..."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만, 그 영혼은 단단하다. "이 늙은 몸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내 딸..."

눈물이 주름진, 깊은 계곡을 따라 흘러내린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딸의 얼굴을 보게 해주세요." 기도는 점점 더 낮은 속삭임이 되어간다. "이 어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밤마다 반복되는 애절한 기도에도 하늘은 대답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치매가 모든 것을 앗아가도 딸의 얼굴과 이름만은 놓지 않으려는 그녀의 손가락은 꼭 붙잡고 있는 것이 있다. 보이지 않는 딸의 손을. 기도를 마치면 그녀는 베개 밑에서 낡은 인형을 꺼낸다. 딸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천 인형. 그것을 가슴에 품고 그녀는 잠이 든다. 딸의 체온을 느끼려는 듯이.

나의 고백

나는 그녀를 '빨간 잠바의 여인'이라 부른다. 그녀의 눈빛에서 나는 나의 어머니를 본다. 그녀의 기다림에서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만난다.

"선생님, 예쁘네요. 고마워요." 그녀가 나에게 건넨 가장 보석 같은 말.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베지밀 하나뿐. 하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사랑의 증표가 된다.

오늘 밤도 나는 생각한다. 그녀의 딸이 돌아와 빨간 잠바의 여인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그때까지, 나는 매일 밤 9시 베지밀 하나를 들고 그녀를 찾아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문법이다. 그녀의 105년 삶에 비하면 내 사랑은 베지밀 한 모금만큼 작지만, 그 작은 한 모금이 그녀의 밤을 달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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