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들의 실수를 따라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영포티밈의 분노는 이해하지만, 전략적으로는 실책일 수 있다

by 박세환

‘영포티 밈’으로 표출되는 최근의 세대갈등은 대체로 남성들 사이의 싸움처럼 보인다. 2030 남성들이 상위 X세대/민주화 세대 남성들을 조롱하고, 이에 상위 세대 남성들이 반격하면서 갈등이 노골화되는 모습 말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여성들의 세계에서는 과연 세대 갈등이 없었을까?

당연히 그럴 리 없다. 오히려 여성들 사이의 세대 전쟁은 남성 사회에서 이제야 본격화되고 있는 이 갈등보다 훨씬 앞서, 더 격렬한 형태로 이미 진행 바 있다.(그저 저들이 문화권력 주도권을 잡고 있기에, 자기들 내부갈등의 처절한 양상을 외부로 표출하지 않고 숨겨왔을 뿐이다.)




‘강남역’ 때만 해도 페미니즘 진영은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부의 노선 차이는 점점 선명해졌다. 갈등의 핵심은 단순했다. ‘여성’이라는 의제를 다른 민주진보적 가치들과 연대하며 확장할 것인가, 아니면 ‘여성’이라는 의제만을 독립적으로, 배타적으로 밀고 갈 것인가.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 진영은 뚜렷하게 갈라졌다.


소위 ‘올드페미’로 불리던 X세대/민주화 세대 여성들은 여성 문제를 노동, 복지, 평화, 성소수자 인권 등 다른 민주진보적 의제들과 연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구조적 약자성을 가진 일부 남성들의 문제 또한 정치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고 말이다. 반면 ‘영페미’로 불리던 2030 여성들은 이 연대 전략에 강한 회의를 표했다. 그들은 오직 ‘여성’ 의제 하나에 전면적으로 집중하길 원했고, 이를 위해 생물학적 성별 이분법을 중심축으로 삼는 대립 구도가 강조되었다. 이 관점에서 남성은, 강하든 약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남성’인 이상 적대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 결과 남성을 향한 거칠고 천박한 언어들이 거리낌 없이 분출되었고, 이 언어는 투쟁의 수단이자 정체성의 표식으로 소비되었다.


언급했듯, 각 입장이 공교롭게도 세대 경계선을 따라 확연하게 갈렸기 때문에, 노선갈등은 자연스럽게 세대갈등으로 전이되었고 여기서 나이는 손쉬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영페미 진영은 올드페미들을 잔소리만 늘어놓는 시어머니, 기득권에 안주한 할망구로 조롱했다. 올드페미들에겐 결혼을 통해 남성 사회와 타협했다는 이유로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특히 아들을 둔 어머니일 경우 그 비난은 더욱 노골적이 되었다.


결국 이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것은 영페미 진영이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매우 전형적인 피로스의 승리였다.

왜냐하면 내전에서 패배해 축출된 올드페미들은, 사실상 페미니즘을 민주진보 진영 전체와 연결해 주던 핵심적인 교집합 축이었기 때문이다. 이 연결고리가 끊기자 페미진영은 셀프고립되어 외부와의 조율 능력을 상실해 갔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 내부 비판이 ‘배신’으로만 처리되면서 자정능력마저 완전히 잃었다.


반면 페미니즘 진영에서 밀려난 일부 올드페미들은 영페미가 주도권을 탈취해 간 페미니즘 진영의 행보에 점점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일부는 남성 인권 의제에 공감하거나, 심지어 반페미 담론에 힘을 실어주는 위치로 이동하기까지 했다.





최근 ‘남성차별’ 의제가 2030 남성을 넘어 상위 세대로까지 확장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환호했던 바 있는데, 과연 우리는 ‘혼자만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일까? 물론 2030 남성들 자체적인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따져볼 지점이 있다. 만약 페미니즘 진영이 강남역 당시처럼 내부 분열 없이 하나로 유지되고 있었다면, 갈등의 결과로 튕겨져 나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손을 들어주었던 외부세력의 존재가 없었다면, 돈과 권력, 학술계 권위 이 모든 지점에서 고립되어 있는 2030 남성들이 오직 자체적인 힘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지금의 국면은 상대의 실책과 내부 균열이 만들어낸 공간 위에 형성된 결과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같은 실수를 다른 얼굴로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최근 ‘영포티 밈’을 통해 남성간 세대 갈등이 빠르게 증폭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한때 비판하던 상대의 실책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건 아닐지 그 가능성에 불안해져 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영포티밈이 어떤 박탈감과 원망으로부터 나오는지 나 역시 내 삶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노를 이해하는 것과, 그 분노에 전략 없이 휘둘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감정만 앞서고 판단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과거 상대 진영이 반복했던 실책을 그대로 재현하게 되고, 그때부터 싸움은 투쟁이 아니라 자폭이 된다.

그러니 부디 실수는 우리의 적들만 하도록 내버려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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