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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Mar 15. 2020

트럼프와 샌더스

한국에서도 가능한가?

경제학자 피케티는 현 제1세계 좌우파를 '울타리 속의 좌우파'라 칭하며 이들을 싸잡아 비판했던 바 있다.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 울타리 밖의 99%의 삶과 완전히 괴리된 체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아무의 삶에도 도움되지 않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해 가는 그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래 미국에서 나타나는, 트럼프와 샌더스로 대표되는 정치적 변화 양상들은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일어난 노란 조끼 운동 역시도. 


이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68 혁명 이래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기성 좌파 우파의 정형화된 도식(경제문제를 내던지고 68 혁명 신좌파적 가치들에만 천착하는 좌파 / 문화적 보수주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경제적 자유주의, 기업 중심주의에만 천착하는 우파)을 완전히 허물어버리는 현상이라는 것.  


트럼프는 68 혁명 이래로 공식적으론 누구도 감히 입밖에 낼 수 없었던 대안 우파적 생각들을 가감 없이 쏟아내며 대권을 거머쥐었다. 샌더스는 경제적 불평등이 아닌 여성, 인권, 소수자, 문화상대주의처럼 '신좌파스러운' 가치에만 집착하는 현대 진보의 방향성에 큰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노란 조끼는 그동안 "불가능하다."라고만 여겨졌던 극좌와 극우의 연합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울타리 속의 좌우파' 그 무의미한 적대적 공생관계에 지친 아웃사이더들의 반항을 보여주는 이 현상들은 정치 사회학계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필자가 궁금한 점은, 68 혁명 이래 반세기 동안 굳어져 온 좌파 우파의 '매뉴얼'을 흔들어놓은 정치적 혁명이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하는 점이다. 

특유의 그 빠른 발전으로 서방이 이 백 년 동안 거쳐왔던 사회발전의 발자취를 반세기 만에 따라잡아버린 한국이니 오늘날 서방을 뒤흔들어 놓은 정치적 격변들도 한국에서 고스란히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엔 회의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많은 서구인들이 트럼프나 샌더스와 같은 '울타리 밖의 좌우파'에 열광하게 된 것은, 반세기를 지속해온 그 지긋지긋한 '울타리 속의 좌우 싸움'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역시 '울타리 속 좌우 싸움'에 싫증을 내는 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엔 결정적인 차이점도 존재한다. 서구에선 그 '실증'이 거의 전 세대에 걸쳐 나타남에 반해 한국에서 그 '실증'을 표현하는 이들이 대부분 젊은 세대에만 국한되어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2030 젊은 세대만 가지곤 '변화'를 만들어내기 힘들다.


한국의 사회변혁 속도가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서구에선 이미 지나가버린 시대를 대변하는 세대가 한국에선 버젓이 살아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변수를 만들어 낸다.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 근대화에 대한 향수로 대표되는 산업화 세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대. 

그리고 이들 간의 끝없는 싸움.


2030 포스트 민주화세대는 이제 슬슬 그 싸움에 실증이 날 지언정, 한국의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에게 '그 싸움'은 아직도 신성하다. 이들에겐 여전히 "악질 빨갱이 소탕"이나 "군부독재의 떨거지들 소탕"이라는 '시대적 사명'이 너무나 숭고하기에, "기성 좌우파 구도를 뛰어넘는 새로운 변화"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집중하지 않는다. 이들은 여전히 "울타리 내의 좌우파 싸움"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느낀다.


나는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그러한 변화들이 나타나기 힘든 이유'라고 본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트럼프나 샌더스는 시기상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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