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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를 보는 두 가지 시각

절대주의의 폐단인가 상대주의의 참극인가

by 박세환

나치를 절대주의적 폐단으로 보는 시각은 꽤나 보편적이다. 간단하게, 세상 모든 문제에는 절대적인 '정답'이란 것이 존재하며, 그 정답으로써의 인식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인식은 '오답'이기 때문에 기각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나온 비극적인 결과가 나치였다는 것이다.

절대 정답을 제외한 다른 생각들은 틀린 생각이니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다 죽여 없애도 무방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나치의 근원 심리.


이런 식의 해석은 전후 극단적 상대주의, 해체주의로써의 포스트모던 중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떤 절대적 올바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 '올바름'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나치 파쇼와 같은 전체주의적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우리는 세상에 어떤 '정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멀리하고 다양한 시각과 삶의 태도를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옳은 방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얽매이지 않는 제멋대로, 중구난방의 삶을 추구해야만 한다. 아무 데서나 마약하고 섹스하고,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거나 아예 미쳐서 정신병자가 된다 하더라도 그 역시 무척이나 낭만적인 삶 이리라…. 그래, 히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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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치의 폐단을 바라보는 정 반대의 시각도 존재한다.



"내게 한 문장만 다오.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나치의 전설적인 선전관 요제프 괴벨스의 명언. 괴벨스는 악명 높은 나치식 선전술의 기틀을 다진 사람이다. 악마적임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강력한 위력을 보여주었기에, 오늘날 정치 사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즘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나치식 선전술이다.


괴벨스의 저 발언을 '뜯어'보면, 괴벨스의 정신세계에 있어 무척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누구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는 발언은, 범죄자가 아닌 사람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괴벨스 자신은 그 지점을 충분히 활용할 의지가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단순한 절대주의의 관점 하에선 이러한 일은 있어선 안된다. 범죄자인 사람만이 범죄자여야 하며, 당연히 누구도 이 도식을 흩뜨리려 해선 안 되는 것이다.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정답과 오답. 이 모든 경계는 명확해야만 한다.

그러나 괴벨스는 그 절대주의적 구분선을 허물어뜨리려 하고 있다! 그에겐 진짜 범죄 여부는, 진짜 선악의 여부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단 하나의 문장만으로' 그는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고자 한다. 애초에 무엇이 '진정한' 선악인지 여부는 중요치 않아진다.


그에게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20191030_133621.jpg Paul Joseph Goebbels. 1897 ~ 1945


진정한 진리, 참된 선과 악의 구분,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무척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주의, 해체주의적이다.

여기서 나치의 악행들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이 드러난다. 나치는 자신들 나름의 '절대선'을 추구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애초에 어떤 선이나 정의로움 따위를 추구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세상엔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다. 고로 우리는 '그 어떤 짓'이라도 해도 된다!"


나치가 활동했던 시기는 철학 사상계에서 니체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이다. 그리고 알려진 바와 같이 니체는 도덕, 정의, 선 등의 내용이 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공간에 따라 끝없이 변화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유명해진 사람이다.("신은 죽었다!")


절대적인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적 견해는 필연적으로 삶에 대한 허무, 회의주의적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생명, 생존, 사랑, 진리, 인권, 신뢰 등, 우리가 소중해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이 무가치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치의 시대 그 자체이기도 했다.


우리는 극단적 상대주의 해체주의적 사조가 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68 혁명과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그 '진짜' 기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오래됐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치를 단지 억압적 절대주의의 폐단으로만 보는 시각으론 답하기 힘들어지는 지점 중 하나가 "나치는 자유의지를 가진 다수 사람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권력을 획득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다.

오늘날 극우사상의 부활을 꿈꾸는 이들이 늘 들고 나오는 슬로건도 상대주의와 표현의 자유 아니던가?!


극단적 상대주의로써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나치의 폐단을 상대주의가 아닌 절대주의의 폐단으로 '확정(?)'지음으로써 그 사조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악행이 절대주의가 아닌 상대주의에 기반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면, 그러한 해석이 유효할 수 있다면, 나치의 '절대주의적' 폐단 그 모순의 틈 속에서 싹을 틔었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68 혁명, 신좌파적인 가치 그 전반에 대해서도 한번 즘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연 상대주의는 그 자체로 올바르다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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