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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Apr 27. 2021

내 삶이 비극일 줄 알았는데 Fucking 코미디였어

최악의 약자를 판별하는 기준. '희화화'

오랜만에 조커 이야기


"내 삶이 비극일 줄 알았는데 Fucking 코미디였어"


학창 시절 찐따들을 떠 올려보자. 일진들이 찐따들을 마구 때리고 괴롭힌다. 찐따는 괴로워하고 울부짖지만 그러나 아무도 이를 위로하지 않는다. 심지어 울부짖고 괴로워하는 그 모습마저 새로운 조롱과 희화화의 소재로 차용된다. "흐지믈르그~~ㅋㅋㅋ 흐지믈르그~~ 엌ㅋㅋㅋㅋㅋ" 

이 상황에서 '찐따'는 하나의 인간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날개와 다리를 하나씩 때어내 서서히 죽이면서 즐겨 마땅한 벌레 새끼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학교폭력으로 인한 자살'은 보통 그렇게 발생한다. 


단순히 일진이 때리는 물리적 강도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정도는 쉽게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찐따를 더 괴롭게 하는 건, 내가 세상으로부터 배제되어있다는 그 X 같은 기분이다. 

세상에 있어서 나는 흥미로운 장난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괴로운데, 내 삶이 비극인 것 같은데, 이 X 같은 세상은 그 모든 걸 그저 'Fucking 코미디'로 만들어 버릴 뿐. "흐지믈르그~ 흐지믈르그~ 엌ㅋㅋㅋㅋㅋ"


나는 나의 슬픔과 괴로움을 전달할 자격도 없는 거지. 세상에게 있어 내 모든 아픔은 그저 싱거운 Fucking 코미디 한 조각일 뿐이니까.



...


68 신좌파 혁명은 여성의 아픔을, 이슬람의 아픔을, 불량 청소년의 아픔을 너무나 숭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반면 '찐따 남성'의 피해 서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건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으며, 관심 가질 필요가 없는 무언가가 된 것이지. 죽어야 관심 좀 받을까..("내 죽음이 삶보단 더 '가취'있기를..")


'여성의 아픔'은 이제 너무나 숭고해져서 우리는 지하철에서 시선 강간을 당했다는 부르쥬아 엘리트 여성의 아픔에 깊게 공감해 눈물을 흘려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찐따 남성은 뒷골목에서 죽도록 얻어맞아도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건 그냥 'Fucking 코미디'일뿐이니까.


"너희는 어디서 웃어야 하고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지."

"아~ 그 자식들(조커가 쏴 죽인 금융 쟁이 3명)이 대체 뭐라고 그렇게들 슬퍼해! 왜? 토마스 웨인이 우쭈쭈 해줬으니까? 당장 당신들 옆을 살아가는 나한텐 X도 관심 없으면서!"

"내가 죽었으면 내 시체를 밟고 갔을 것들이..!!"


+조커는 아서 플렉으로 직접 살아보지 않은 입장에서 이해하기 쉬운 캐릭터가 아니다. 직접 아서 플렉으로 살아 봤어야 안다. 뭐가 어떤 의미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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