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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Feb 07. 2021

그 페미니즘 비판 5 - 여성미는 노예의 미덕? 2

공대 아름이의 전설


남녀 간 성욕 차이로 인해 여성은 종종 남성에게 성적 대상으로 보이곤 하는데 그 ‘여겨짐’ 자체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 된다는 주장 역시 흥미롭다. 맞다. 남녀 모두 성욕이 있다곤 하지만 남성의 성욕이 여성의 그것을 상회한다는 것이 널리 퍼진 상식임으로 이 부분에 대한 별도의 근거를 첨부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아무래도 남녀가 있으면 남자 쪽에서 여자 쪽에 먼저 치근덕거리는 경우가 많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성범죄가 발생한다는 것 역시도 인정한다. 


나는 남녀 간 성적 치근거림이 케바케라 누가 더 잘못이라 할 것이 없다는 상투적인 포스트모던식 변명을 늘어놓고 싶진 않다. 남성 쪽이 더 ‘저돌적’이라는 경향성은 인정하는데, 과연 그것이 여성 쪽에 손해이기만 한지를 따져보고 싶은 거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KTF에서 ‘공대 아름이’라는 주제로 신박한 광고를 찍었던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인즉 이러하다. 여자가 ‘아름이’ 한 명밖에 없는 어느 공대 학과에서 MT를 가기로 했는데, 개인 사정에 의해 아름이가 엠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자 학과의 모든 남학생들이 “I ♥️ 아름”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서 “아름아 엠티 가자”를 외치며 소위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에 못 이긴 아름이는 결국 엠티에 참석하기로 한다.


엠티 장소에서 남학생들이 아름이를 중심에 놓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중, 바로 옆방으로 여대생들이 엠티를 오게 되고 이 소식을 접한 남학생들이 여대생들을 구경하러 우르르 몰려 나감으로써 아름이는 얼떨결에 혼자가 되고 만다. 광고의 내용은 여기까지.



이 광고는 남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그 전형을 보여준다. 아름이? 동료 남학우들로부터 명백하게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아름이가 괴로워했는가?”하는 부분이다. 당연히 광고 속의 아름이는 자신이 ‘공대 여신으로 여겨짐’을 충분히 즐거워한다.


광고의 마지막은 특별히 인상적이다. ‘옆방 여대’가 모든 남학생들을 빨아드림으로써, 사실 그 지점에서 아름이는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더 이상 더러운 ‘냄져놈들’로부터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 그래서 아름이가 기뻐하는가? 광고 속의 아름이는 이 지점에서 볼펜을 땅바닥으로 집어던지며 불쾌해한다.


아름이는 성적 대상화를 통해 손해를 보지 않았다. 성적 대상화가 그녀에게 권력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성적 대상화로 인해 아름이는 동료 남학우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보통 공대는 남학생들이 많이 진학한다. 때문에 공대에는 항상 여자가 적다. 남자는 많은데 여자는 적다 보니, 한창 욕구 왕성할 시기의 남학생들이 소수의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려고 매달리는 경향이 생겼다. 소수의 여성들은 이것을 성적 권력으로 활용하여 과제활동 내지 식비 지출 등에서 남학생들을 상대로 많은 이득을 얻어내는 상황 역시 발생하게 되었다. 희소성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여신’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이 현상을 대학가에선 ‘공대 아름이 현상’이라고 불렀는데 KTF가 광고를 통해 이 현상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해내었다. 


그럼 여성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하는 예체능계와 같은 곳에선 어떨까? ‘공대 아름이’에 비견할 만한 ‘미대 지훈이’ 내지 ‘음대 성준이’ 현상도 일어날까? 성욕의 차이 때문인지 애석하게도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여초 학과의 남학생들은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자, 성욕 차이로 인해 ‘성적 대상으로 여겨짐’이라는 것이 여성에게 손해로만 작용하고 있는가? 물론 이로 인해 명백히 손해가 되는 측면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무수한 성범죄 들을 떠 올려 보자.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권의식의 개선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성적 침해 현상은 갈수록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엔 죄라고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들도 이젠 명백하게 잘못이라 인식되고 있다.(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강간을 당해도 자신의 책임이 된다.) 그 속에서, 여성이 ‘성적으로 괴롭힘 당할’ 여지는 계속 줄어가는 것이다. 반면에 성적 대상화로 인한 이득, 위에 언급한 ‘공대 아름이 현상’과 같은 성권력은 계속된다. 이 현상은 남녀 간의 성비 격차가 벌어질수록 더욱 심화된다.


… 


여성이 ‘성적 대상화됨’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 속에 나온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연계된 모든 것들을 ‘노예의 미덕’으로 폄하해 버렸다.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긍정적 측면들은 담론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됐다. 


그러나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던, 반대로 그것을 즐거워했던 여성들 역시 많았다. 여기서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최악의 실책이 나온다. 



‘코르셋’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여성들을 “노예의 미덕이나 추구하는 하찮은 흉자들”로 매도하고 배척해 버린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배척된 여성들의 규모가 상당했다는 점에 있었다. 남성이 아닌 여성들에게서도 레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저항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많은 대학들에서 나타난 총 여학생회 폐지 현상은 여학생들의 적극적 협조를 가정하지 않고서야 아예 설명되지 않는다. 


한동안 시끄러웠던 레디컬 페미니즘은 그렇게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공대 아름이가 실존하냐고? 실존하는 거 봤냐고? 

 내가 공대 나왔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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