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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Feb 09. 2021

그 페미니즘 비판 7 - 여성의 사회진출2

남성 인생의 특수성


페미들은 여성이 사회진출의 장에서 상대적으로 효능이 떨어지는 선택을 내리게 되는 것이 여전히 남아있는 가부장제의 요소들의 작용 때문이라는 식으로 반격한다. 여성들은 여전히 암묵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부장제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여성만의 신체적 제약 요소들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임신으로 인한 경력단절 내지, 고된 노동에의 불리, 밤 활동에 대한 제약 등 말이다. 이런 요소들은 여성으로 하여금 ‘효능이 떨어지는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지만 이것을 여성의 잘못이라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그럼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여성은 여전히 사회활동에 있어 불리한 제약을 더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볼까? 그럼 그것이 인정되는 순간, 남성에 대한 여성의 피해 서사는 다시 정당해지는가? 실제 많은 안티 페미들이 이 지점 못 넘어간다. 근데 정말 이게 못 넘어갈 지점이었으면 내가 이야기를 여까지 끌고 오지도 않았겠지? 나는 이 지점을 넘어가 보려 한다.


여성이 이래저래 결과적으로 사회활동에 있어 남성보다 불리할 수밖에 없는 많은 요소들은 여성으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집안 활동 쪽에 더 주력하도록 강제한다. 그런데 이것은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일방적 제약일 수가 없다. 여성에게 집안일이 ‘강제’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남성에겐 바깥일이 ‘강제’되어왔다는 사실과 거울 쌍을 이룬다.



...


앞으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전통적 사회 구도는 남성과 여성에게 각자의 할 일을 나누어 배정해 왔다. 페미니즘의 일방적 여성 피해 서사는, 이 오래된 남성과 여성의 역할분담에 있어 여성이 받은 어떤 역할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언제나 더 나빴다는 피해의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남성과 여성이 할 일을 분리해 놓았는데, 게 중 남성이 받는 역할만 다 좋은 것이고 여성이 받는 역할은 다 나쁘기만 했다면 당연히 여성은 항상 피해자이고 불쌍자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 그러한가?(일전에 언급한 ‘성적 대상화와 탈코르셋’ 부분을 떠올려보라.)


“여성이 집안일을 강요받고 남성이 바깥일을 강요받아 왔다.”는 사실을 ‘여성에 대해서만’ 피해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오래된 페미니즘 서사는 바깥일보단 집안일(이를 테면 상대적으로 나긋나긋하고 소소한 일들)을 더 선호하는 남성의 욕구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배제해버린다. 억지논리라고 생각하는가?


필자의 학창 시절 때 유행했던 단어 중 ‘셔터맨’이라는 용어가 있었다. 이는 자신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능력 있는 아내를 만난 무능력한 남편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남자는 집안일을 전담하며 바깥에선 그저 아내의 사업장 셔터를 올리고 내려주는 역할 정도만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 ‘셔터맨’은 수치의 대상이면서도 한편으론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단 내가 동경했고, 내 주변 많은 친구들도 공감했다.


사회는 남성으로 하여금 바깥일을 해야만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인정해준다. 이는 커리어우먼으로써 바깥일 열중해도 되고, 전통적인 여성상에 입각해서 집안일에 집중해도 되는, 양쪽 어디를 선택해도 좋은 여성과 명백히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 남성에겐 선택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과 달리 남성이 자신의 취향보단 사회적 쓰임 위주로 전공을 선택하게 되는 것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셔터맨’이 수치의 대상이건 동경의 대상이건, 어느 쪽이건 이 단어는 ‘남성의 피해 서사’를 반영한다. 셔터맨이 수치의 대상이라면 ‘집안일하는 남성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전통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가하는 폭력인 것이며, 동경의 대상이라면 실제 무능력한 남성이 유능력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기 어려움이 있음에 대한 증거가 된다. 


(여성의 경우엔 자신보다 능력 있는 남성을 배우자로 맞이하는 것이 사회적 상례이다. 결혼정보회사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무능력한 남성의 삶은 무능력한 여성의 삶보다 더 비참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영역 확보에 실패했을 때, 여성은 ‘취집’을 최후의 선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성도 그러한가? 남성도 사회적 영역 확보 실패에 대한 보험(?)으로 ‘취집’에 상응되는 ‘취가’를 선택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여성과는 달리 남성에게 있어서 결혼이란,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정착이 이루어졌을 때에야 ‘보상’으로써 주어질 수 있는 개념이다. 


때문에 여성과 달리 남성이 사회진출에 실패했을 경우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보통 하나밖에 없다.


“30대 장기 고시생 A 씨, 자신의 신변을 비관하여 고시원에 불을 질러 자살시도. 화재 발생으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쳐.”




사회적 능력을 갖추는 것은 여성에겐 ‘선택’ 일 수 있지만 남성에겐 ‘의무’가 된다. 그러나 ‘여성의 낮은 사회진출도’를 문제 삼는 페미들은 이러한 ‘남성 인생만의 특수성’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게, 여성의 사회진출도가 더 낮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남성 가해자 여성 피해자”라는 결론으로 이어버린다.


언제나 그렇듯이, 페미들의 일방적 여성 피해 서사들은 성별 간 상투적인 역할 구분이 남성에겐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에 대해선 절대 말하지 않는다.



다음엔 “여성. 그리고 폭력의 피해자”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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