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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Feb 18. 2021

그 페미니즘 비판 8 -  폭력의 피해자

폭력으로 점철된 남성의 삶

*성범죄에 관한 측면은 일전 ‘성적 대상화와 탈코르셋’ 코너에서 다소 언급되었고 여기선 욕설 , 주먹질, 살인과 같은 ‘원색적인’ 폭력 위주로 다룹니다.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여성의 육체적 힘이 약하기 때문에 여성은 각종 폭력에 노출될 확률이 더 높다는 이야기 역시 페미들이 미는 주된 피해 서사 중 하나이다. 정말 그러한가? 


그러나 성범죄를 제외한 다른 강력범죄들에선 남성 피해자의 규모가 여성 피해자의 규모를 훨씬 넘어선다는 것에 대해 이미 수년 전 박가분 선생이 입증했던 바 있다.(잘못 계산한 것이 아닐 것이다. 외국에서도 보통 그렇거든.) 물론 그렇다고 해서 페미들이 그 말을 듣고 그냥 물러서진 않는다.  


필자는 아주 오래전에 “사적 질서 속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수한 폭력들”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 글에서 "사적인 정리 관계일수록 소소한 폭력 하나하나를 고발하긴 어렵다."는 언급을 했던 바 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런 부분을 중시한다.

그들은 여성에 대한 (실제 신고와 고발로 이어지지 않는) 크고 작은 무수한 폭력들이 상존함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반가운 주장이다. 나 또한 그러한 “통계 밖의 암묵적 폭력들”을 중시하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성의 삶이란 시작부터 끝까지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폭력 속에 내 던져져 ‘폭력을 통한 소통방식’을 온몸으로 채득 하게 되는 과정들. 전체 남자 중 그것을 정말 원했던 이가 몇이나 될까? 


전통적인 성 구분이 더 일상적인 가정일수록, 양육과정에서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보다 더 많은 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전통적 성 관념 하에서 남자는 거칠고 폭력적인 상황을 더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전에 쓴 ‘똥 마초’ 글 참조)


학교를 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자아이들은 폭력을 통해 서열을 나누는 의식을 자체적으로 진행한다. 학년 초마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선 으레 욕설과 주먹을 이용한 거친 막고라들이 벌어지게 되고 이를 통해 누가 일진이 될지, 누가 찐따가 될지가 결정되곤 한다. 폭력에 의한 승리자가 패배자를 짓밟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남자아이들은, 앞으로 그들의 삶 속에서 평생을 이어질 그 저주받은 경쟁과 서열의 삶을, 힘 약한 수컷 개체의 말로란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습득하게 된다.(이미 전의 글들을 통해서 누차 언급해온 부분이지만, 약한 수컷의 삶은 약한 암컷의 그것보다 훨씬 못하다.)



그렇게 남자아이들은 세상엔 힘이 전부이며 약함이란 경멸의 대상임을, 약자가 짓밟히고 죽임을 당하는 일은 자연의 정당한 이치라는 걸 배워나간다.


군대는 지금까지 배워온 모든 것들을 다시 한번 복습하는 자리이다. 이 전 단계에선 그래도 (비록 허울뿐이지만)‘자유민주주의’라는 명분 하에, 사람이 사람을 짓밟는 것은 분명히 ‘부당한 일’이었다. 군대? 여기선 정당하다. 아니, 애초에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나누는 자체가 무척 합법적이고 정당한 일이 된다. 상위계급이라는 이름하에 하위계급의 사람을 짓밟는 것은 군기 유지와 안보기강 확립을 위해 지극히 합당한 일인 것이다!


여기가지 오면 보통 남성 사회의 적응자와 부적응자가 나누어진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그러한’ 폭력 상황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공식적인 이의를 제기하려고 했던 이들은 보통 부적응자가 된다. 


바람직한 적응자라면, 원래 세상은 이런 곳이니 위로부터 내려오는 온갖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을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또한 바람직한 사회생활 아니던가.^오^


나보다 센 놈 앞에선 굽신거리고 나보다 약한 놈 앞에선 기꺼이 여포가 되는, 이 사회가 원하는 진정 바람직한 남성은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아닌 게 아니라 남성의 이런 특질이 사회생활에 있어 더 유리함으로 작용되는 측면도 있다고 본다.)



살면서 필자가 여자들을 부러웠던 지점 역시 상당 부분 여기서 나온다. 아무래도 여자들은 이 X 같은 뫼비우스의 띠로부터 한 발정도 떨어져 있을 수 있으니까. 


지금도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유년기의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몸이 약했다. 어지간한 여학우들보다 더 약하면 약했지 강하진 못했을법한데 어쨌든 남자라고 항상 “거침과 투박함”의 영역으로 분류되고 보내져 왔다.


간혹 남자들의 울타리를 절대 벗어나선 안 되는, 그 정제되지 않은 더러운 폭력의 찌꺼기들이 본의 아니게 여자들의 영역까지 튕겨 들어갈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여자들은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할 부당한 상황”이란 식으로 반응하곤 했다. 



나한텐 숨 쉬듯이 일상적인, 일상적이어야만 했던 어떤 일들이 여자들의 세계에선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할 만큼” 부당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성은 피해자”라는 서사를 거부하게 된 삶의 계기이다.


페미들은 “남자들 간의 폭력은 그들 스스로가 행한 것이니 여자를 탓할 수 없지만 남자의 폭력이 여자의 영역까지 넘어오는 경우엔 이를 원치 않았던 여자 입장에서 당연히 남자 측을 탓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 일 듯하다.


나도 원하지 않았다고.

근데 내가 니들보다 훨씬 더 많이 맞았다고.


+남자는 폭력에 대한 공포가 여자보다 적다고? 마동석이 술집에서 술 마시다 화나면 진숙이 은정이 패겠냐 그 옆에 있는 날 패겠냐? 또 그렇게 처 맞고 나면 나 처 맞았노라고 당당하게 말이나 하고 다니겠냐?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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