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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May 27. 2021

본질을 논할 수 없었던 비굴함

일진 대감님들을 건들 수는 없으니까..

일전 초등학생 시절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급식시간에 매번 새치기를 한다는 이유로 학우들에게 왕따와 비슷한 대접을 받던 애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친구와 함께 귀가를 할 일이 있었고 그때 나는 넌지시 질문을 던져 보았다.  


"니가 맨날 새치기한다고 다 널 싫어하는데 왜 그렇게 새치기를 하냐?"

그러자 그 친구의 답


"근데 나만 새치기하는 건 아니잖아. 다른 애들도 새치기하는데 왜 니들은 나한테만 그래?"
 

순간 기가 막혀서 되물어 보았더랬지. 

"아니, 울반에서 너만큼 새치기하는 애가 또 어디 있다고 그럼?"

그러자 그 친구가 답했다.


"XX나 OO나 ㅁㅁ, 이런 애들 나도다 더 많이, 자연스럽게 새치기하잖아. 왜 걔들한텐 아무도 뭐라 안 해?"


...


사실 그랬다. "XX나 OO나 ㅁㅁ", 얘들은 우리 반 일진들이었다. '왕따 친구'를 비난하는 우리들은 무의식 중에 이 '일진들'에 대해서는 아예 '우리'의 범주에서 예외 시켜 놓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하이 한 이들이었고 우리는 그저 "같은 평민 찐따 주제에 가암히 일진 나으리를 흉내 내려 했다는 괘씸죄"로 이 왕따 친구를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부당해도 일진한텐 뭐라 할 수가 없지. 처 맞을 테니까. 처 맞는 게 무서우니까.


정곡을 찔린 나는 무어라 답할지 몰라 당황하다 마지못해 답변을 둘러댔다.


"그... 그... 걔네들은 같은 우리라 하기엔 너무 더럽고 비열한 애들이라 애써 언급할 가치가 없었던 거야! 걔들이랑 달리 우리는 품위를 지켜야지!"

"정말?"

"ㅇㅇ"

... 당시에 난 이 답변이 꽤나 훌륭하고 적절했다 생각하며 스스로 자위했었다. 


개뿔.. 난 비겁자였고 약자 평민의 그 비굴할 수밖에 없는 처량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비겁하고 더러운, 궁색한 변명을 둘러댔을 뿐인데 말이지.


...


시간이 흐르고, 정치 사회판에서 '정말 잘못된 A라는 대감님께는 도저히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어서 애꿎은 B나 C를 때리며 본질을 회피하고 싶어라는 기성 엘리트들'의 비굴하고 야비한 실태를 볼 때마다 이 일화가 떠 오르곤 한다. 요즈음 특별히 더 그러해서 한번 언급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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