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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Dec 08. 2019

인페스티드 유럽 - 우엘벡의 '복종'1

현대 진보의 모순. 이슬람'도' 진보인가? 

'셰인 일병의 교육'이란 제목을 가진 스타크래프트 단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감염된 테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비극적 이게도 소설의 주인공인 '셰인 일병'은 저그로부터 감염이 진행되는 중이다. 


일반적으로 '테란의 감염' 하면 지극히 '유물적인' 상황으로 여겨지지만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그 과정을 지극히 '관념적인' 측면에서 그려낸다. 이를테면, 감염이 진행 중인 숙주는 꿈과 같은 몽롱한 상황 속에서 경험에서 비롯된(것으로 보이는) 관념적 고통을 끝없이 겪게 된다. 그리고 이 속에서 감염충은 넌지시, 그리고 꾸준히 말을 건다. 


"(네가 관념적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지."


군단에 합류하라는 이 제안에 대해 셰인 일병은 마치 겁탈에 저항하듯 거칠게 반항하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정신적 고통 속에 결국 포기하고 무릎을 꿇게 된다. 감염은 그렇게 완료된다. 

지금, 군단의 일원이 한 명 더 늘었다.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복종'이라는 제목을 한 이 저명한 소설의 존재를 들어는 보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샤를리 에브도'테러사건이 벌어지던 바로 그 시점에 출간된 이 소설은 프랑스가, 유럽이 결국 이슬람에게 '감염'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유럽 이슬람화의 과정은, 특히 주인공이 (나름 거부감을 가졌음에도) 결국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마는 그 과정은 '셰인 일병의 교육'에서 셰인 일병이 관념적으로 군단에 굴복하고야 마는 그 과정과 상당히 흡사하다. 



대학교수로서의 안정적이면서도 퇴폐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인공은 삶에 대한 권태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적 혼돈을 겪는다. 근대 이후 유럽의 이상이 된 "더 많은 자유"는 그러나 유럽에 오직 공허와 허무와 권태만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슬림이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그의 특출 난 능력으로 인해(작중 나폴레옹에 비견된다.) 프랑스는 서서히 이슬람화 되어간다.  

그리고 이슬람은 관념적 고통을 겪고 있는 주인공의 귀에 대고 끝없이 속삭인다. 


"(네가 관념적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지."


결국 주인공은 목소리(?)에 굴복하고야 만다. 

지금, (이슬람) 군단의 일원이 한 명 더 늘었다.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착한 척하기 좋아하는 진보 쟁이들은 입을 모아 비난을 쏟아냈다. 더럽고 비열한 이슬람 혐오 공작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어보았으면 알겠지만 소설엔 이슬람에 대한 그 어떤 비난도 들어있지 않다.(마치 '셰인 일병의 교육'이 저그에 대한 그 어떤 비난도 담고 있지 않듯이….)


소설은 그저 이슬람 사회의 보편적 현실을 유럽이라는 배경 속에 풀어놓고 있을 뿐이다. 여자들이 몸매를 감춘다. 여자들은 직장에서, 특히 교육현장에서 퇴출된다. 능력 있는 남자는 (자연의 섭리라는 변명 하에) 여러 첩실을 거느린다. 여자의 목적은 그저 남편에게 충실하고(가사활동+성적 쾌락) 아이를 잘 돌보는 것으로 축소된다. 오늘날까지 이슬람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나 온" 현상들을 풀어놓았음에 불구한데도 그것을 "혐오"라고 말하려 한다면, 68 혁명 이래 진보의 오랜 전통이었던 '문화적 상대주의'가 잘못되었음을 진보 스스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는가?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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