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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Jul 15. 2022

찌질천장-남자의 아픔은 말하지 마라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있는가?

필자는 얼마 전 열린공감TV의 젠더갈등 토론에 패널로 참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t2WwsJ0ko4

이 토론에서 각 패널들은 모두 저 나름의 욕을 먹었고, 각자 그 부분을 유심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물론 나도 욕을 먹었다.


"저 새끼는 생긴 거부터 전형적인 2번남 개찐따네 준서기 좋아할 듯 엌ㅋㅋㅋㅋ" "얼굴만 봐도 차후 내용이 짐작 가는 이런 신기한 마법ㅋㅋㅋ" 이런 내용이야 처음부터 악의적인 비난에 불과하니 기분은 나빠도 진지하게 볼 건 없는 것들이고, 내가 인상 깊게 본 비판은 주로 이런 것이다.


"주장이 너무 찌질하다. 여자가 남자 영역 들어옴에 대해 힘겹다 말하는 건 정당하지만 남자가 여자 영역 못 들어간다고 찡찡거리는 건 너무 없어 보인다."


"여자가 취직 못 하는 건 부당한 일이지만 솔직히 저 새끼처럼 남자인데 가정주부 못 한다고 찡찡대는 건 굉장히 찐따처럼 보인다. 솔직히 저 새끼 엄청 찌질해 보인다."


"아서라! 나도 극단적 페미니즘은 싫어하지만 그래도 여자가 더 피해자이고 불쌍자라는 대전제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게 맞다! 남자의 고통과 여자의 고통을 동급으로 놓으려는 저 안경재비는 지금 너무 선을 넘고 있어! 워마드도 좀 아니지만 저 안경재비 같은 안티페미도 아닌 건 아닌 거야!"


...


열린공감 TV의 주 시청자층은 4050 민주화세대 아재들이다. 


박지현 사태를 거치며 민주진보진영 민주화세대 아재들 사이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퍼지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4050의 반페미 관점은 2030의 반페미 관점과 여전히 큰 차이를 보인다.


필자가 수년간 누차 말해왔던 데로, 이제 2030 반페미에선 단순히 워마드와 같은 '일부' 폭주행위를 넘어 "여자는 피해자, 남자는 수혜자"라는 페미니즘의 기본 전재 그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표한다. 이를테면, 거의 대부분 2030 반페미에서는 남자가 수혜자라는 도식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2030 집단에선 "여자가 바깥일 못 하는 게 차별이라면 남자가 집안일 못 하는 거도 차별이다!" 말하는 게 먹힌다.


하지만 4050은 다르다. 이들은 '여전히' "남자는 그래도 남자여아 한다." "여자가 피해자이며 남자가 수혜자라는 페미니즘의 대전제 자체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그저 워마드나 박지현 같은 '일부 일탈행위'의 '과정적' 실책에 대한 비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민주진보진영의 페미니즘관 그 오래된 디폴트 값이 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차 말했듯이 "여자는 피해자 남자는 가해자"라는 이 오래된 대전제 자체를 뭉개지 않고서 그 실천 과정에서의 실책만 논 하는 걸로는 결코 페미니즘의 아성을 이길 수 없다. 언제나 "잘못되지 않은, 착한 페미니즘" 담론에 먹혀버리기 때문이다. 워마드나 박지현 같은 실천과정에서의 오류만을 공격하는 논쟁은 결국 언제나 "그럼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진정한 페미니즘'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식의 논의로 귀결될 뿐이다.


...


누차 반복해 온 말이지만, 이백 년 페미니즘 운동의 결과로 이제 '여자'는 '남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다. 사실 이 지점을 집지 않고서야 오늘날의 '젊은' 젠더갈등 양상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남자가 여자 됨의 어려움"을 논 하는 건 해선 안 되고


"여자가 남자 됨의 어려움"만을 논 해야 한다면, 당연히 여자만 항상 피해자이고 그렇게 페미니즘은 지극히 정당해지겠지!


"여자가 남자 됨의 어려움"을 논 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게 유리천장 이야기라면


"남자가 여자 됨의 어려움"을 논 할 때 논 해야만 하는 무언가는 바로 '찌질천장'이다. 남자가 여자 되는 게 어려운 어떤 요인을 말할 때마다 항상 느껴지는 이질감, 징그러움, 어색함, 그리고 찌질함.. 이것이야 말로 남자의 어려움을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거대한 장벽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바지를 입을 수 있지만 남자가 치마를 입는다는 건 아예 상식선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여자의 유리천장은 그나마 말은 할 수 있지만 남자의 찌질천장은 그걸 언급하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남자가 받는 차별의 강도는 오히려 여자의 그것보다도 더 크다고 말해야 한다. 위에 필자가 '실제로' 받은 저런 반응들처럼 말이다!


(사실 저런 반응들이 나오길 내심 의도했던 측면도 있다. 필자가 진정으로 노리는 문제의식의 지점들이니 말이다.)


저 '찌질천장'을 부수기 위해서, 누군가는 그 찌질함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난 그걸 기꺼이 감내할 생각이다. 나는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이 지점("여자가 남자 됨을 허용해야 한다면, 그럼 이제 남자도 여자가 될 수 있도록 허용돼야 하는 거 아닌가?")을 일부러 계속해서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짤은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여장 가수 '콘치타 부르스트'이다. 저 짤이 징그러운가? 이상한가? 역시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이 드는가? 그럼 질문하겠다! '남자'가 '여자'됨을 허용할 수 없다면, 어째서 그 반대(여자가 남자 됨)는 허용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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