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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Sep 21. 2022

‘자연의 섭리’라는 변명

자연성이라 말 하는 그 자의성

젠더 논쟁의 장에서 소위 전통주의자즘 분류되는 이들로부터 많이 나오는 견해 하나를 이야기해 볼까 한다. 오늘날 많은 대안우파류들의 '대안'이 되고 있는 이 주장의 핵심은 “어느 정도 남자는 남자여야만, 여자는 여자여야만 한다.”라는 것인데 나는 이것을 '자연론'이라 부른다. 


이들은 주로 LGBT와 같은 ‘룰(?) 밖의’ 정체성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보이고,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성 역할에 무게를 두면서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라고 말하곤 한다. 이들을 이 글에선 편의상 ‘젠더 자연론자’라고 칭하겠다.


(출생에 의해 귀족 평민을 구분했던) 계급제도와 같은 선천적 요소에 의한 삶의 제약을 거부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선택 가능한 삶의 범주를 가능한 넓혀주어 왔던 것이 현대 문명의 진행방향 아니었느냐는 견해에 대해선 “아무리 모든 것이 선택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젠더에 관한 것만큼은 자연의 섭리를 그냥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란 식으로 답변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여성적인 남성, 남성적인 여성, LGBT 등은 그저 ‘(잘못된 방식으로) 변질된 젠더 현상’들에 다름 아니다. 


설령 그들이 지금 당장 그 ‘변질된 것’들에 대해 공권력을 동원한 강압적 해체를 시도하진 않는다 한들, “그들(변질된 자들)은 틀리고 오답이며 잘못된 사람들”이라는 신념 자체는 확고해 보인다. 강압적 방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능한 한 고쳐지고 치료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반대한다고 하는, 소위 ‘변질된 자’들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만한 ‘자연적’ 근거는 사실 빈약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동성 간 성 접촉은 자연계에서도 심심찮게 발견되며 인류 역사 속에서는 남성이 화장을 하고 치마와 레깅스, 하이힐을 착용했던 적이 많다. 


표준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이라는 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늘 달라지기 때문에, 소위 ‘자연론자’들이 말하는 “바람직한 남성상과 여성상”이라는 것은 (그들의 주장처럼 보편적이고 ‘자연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자의적이라고 보인다.       


혹자는 이에 대해 ‘변질된 자’들이 존재하듯이 ‘변질된 시대와 장소(이를테면 남성이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는…, 동성애가 성행했던…)’역시 존재할 수 있다며, 그러한 왜곡이 존재하지 않았던 태고의 삶을 연구함으로써 ‘정말 근원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려 할 것이다.



(애초에 인류의 특정 시대와 장소에 대해 “잘못되었다.”라고 규정하는 그 자의성부터가 웃기지만) 자동차가 전기를 먹고 다니고 인터넷으로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옆집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시대에다 애써 ‘태고의’ 규정들을 되가져온다는 것이 당최 무슨 의미가 있을 런지….


태고의 삶이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어떤 바람직한 규범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진정 진지하게 믿는다면, 우리가 논해야 할 것은 기껏 동성애가 정당한지 여부가 아니라, 현대인들이 문명의 이기를 버리고 다시 활과 창으로 사냥을 하며 먹고살 수 있을지 여부가 아닐까 한다. 물론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라면 이런 고민을 하진 않을 것이다. 일만 년 전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왔건, 지금 우리는 이미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와 있다.


과거는 과거고 지금은 지금이다. (젠더 역할까지 포함하여) 인간의 삶의 형태는 각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에 적합한 형태로 항상 변해왔다. 표준적이고 바람직한 젠더상을 제시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최소한 그 근거를 과거에서 찾으려 하기보단 그냥 현재에서 찾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도덕률이 그러하듯이, 젠더 분야에서 역시 과거에 우리가 어떠했다는 사실이 현재의(더 나아가 미래의) 우리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던 시대의 ‘룰’이 현재 우리에게 적합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연의 섭리 운운하길 즐기는 이들은 젠더를 넘어 우리의 삶의 전반에 있어 어떤 불변하는 고정적 법칙을 찾고, 또 지켜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고정되고 불변하는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 ‘자연’이라는 단어에 담겨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무척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애초 자연이라는 것은 어떤 고정된 정적 형태가 아니다. 자연은 끝없이 변화한다. 그게 자연의 본성이다. 


(내가 좋아하는) 불가나 도가사상에선 자연의 본성을 변화라고 한다. 변화. 어찌 보면 그것 하나가 유일하게 지켜지는 세상의 절대법칙일 것이다.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조차 변한다.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과 다르며,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공기는 어제의 그 공기가 아니다. 당연히 오늘의 당신 역시 어제의 ‘그’ 당신이 아니다.


사람이 고통받는 이유는, 이 가변 하는 세상을 불변하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라 한다. 좋은 것이 있으면 영원히 소유하고 싶고, 싫은 것이 있으면 영원히 외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연의 섭리는 그렇지 않기에, 좋은 것은 이내 사라져 버리고 싫은 것은 스토커처럼 악착같이 다시 찾아오고야 만다. 기대가 좌절되면서 사람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오늘이 어제와 같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다. 


애초에 불변과 절대로써의 자연 상태를 가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사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려 함은 반드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젠더 자연론자들이 절대적 표준상태에 집착하는 모습은 종종 페미니스트 PC충들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배트맨과 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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