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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Nov 02. 2022

이태원 참사만의 결정적 순간들

그냥 걸어가다가 다 죽었다.

"00시 00분경 우크라이나 북서부 도시 XXXX 동남쪽으로 00km 떨어진 제0번 국도 지점을 통과하던 우크라이나 00 기갑여단이 때마침 그 일대를 지나가던 러시아 주력 사단을 만나 반나절 동안 치열한 교전 진행. 양 측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 발생."


서로에 대해 명백한 살상/파괴 의지를 가진, 온 가지 살상 무기로 중무장한 수 천 단위의 집단이 벌판에서 충돌하고, 반나절 동안 보유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로를 향한 의도적인 살상행위를 수행하였을 때.


'수백 명 단위의 사상자'라는 건 보통 이렇게 발생한다.


그리고 비무장 상태의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기의 도시를 어떠한 교전도 없이 그냥 걸어서 지나가려다 그만큼 죽고 다쳤다. 이 글을 쓰는 11월 1일 11시 30분경 기점으로 사망자 156명, 부상자 151명을 기록 중.


좀 이상하지 않은가? 좁은 장소에 그냥 사람이 좀 많아서 그렇게나 많이 죽고 다칠 수 있다면, 어째서 200만 박근혜 퇴진 시위 때는 왜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는가?(필자가 현장에 있었음..) 그리고 출퇴근길 지하철 2호선은 그 동그라미를 한 바퀴 돌 때마다 수십수백 명씩 죽어 나갔어야 마땅하다.


(참고로 지금 "사람이 많은 상황 그 자체를 위험요소로 판단하고 공권력은 그러한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마땅했다!" 이렇게 책임론을 전개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 주장대로라면 출퇴근길 2호선은 운행하지도 말아야 한다. 특히 신도림/사당.)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우연찮게 현장을 촬영했다는 영상들을 찾아보다 보니 얼추 알겠다 싶은 지점들이 있었다. 이태원 사태에는 이 사태만의 결정적 순간들이 몇 가지 있었다. 




1. 처음엔 '그냥 사람이 좀 많은 정도(ex : 출퇴근 지하철 2호선 사당역)'의 인파가 '그 골목'에 몰려 있었다.


2. 어느 한쪽에서 더 강한 일방향 압력이 인파에 가해졌다.


3. 골목 반대쪽 입구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지점이 가장 가장 가장 결정적이다. -1차 사고


4. 다시 말 하지만 걸어서 빠져 나간 게 아니라 '와르르 무너졌다.' 상당한 밀도(지하철 2호선)를 이루던 상태에서 한쪽 면이 갑작스럽게 와르르 무너져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너진 사람들은 끔찍하게도 팔다리가 마구 뒤엉켜 인외마경을 연출하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지점에서 팔다리가 부러진 이들도 있었을 것이며, 아마 여기서 1차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보인다.




5.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이미 그 시점엔 문제를 인식한 한 무리의 경찰들이 출동해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그런 전개로 인해 그냥 호루라기 몇 번 불러주고 사람들을 해산시키는 손쉬운 방식으로 무언가를 어떻게 해 볼 상황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경찰들은 해산명령이 아닌, 팔다리가 마구 뒤엉켜 인외마경이 되어버린 거품 물고 실신한 몸뚱이들을 '(문자 그대로) 뽑아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이는 여의치 않았다.


6. 그럼에도 한쪽 면에서 발생한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을 반대편 이들에 의한 압력은 계속해서 가해졌다. 이 상황에서 오도 가도 못한 체 가운데 끼여버린 많은 이들이 압사당하게 된다. -2차 사고


대략 이런 상황으로 보인다..


+"밀어! 밀어!"에 대한 다른 해석이 있는데, 전후관계에 있어 어느 한쪽 면이 무너져 내리고 난 다음에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한쪽 면이 무너지고 나서 참사를 인지한 이들이 "(반대편으로) 밀어!"를 외쳤는데,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를 인지할 수 없었던 골목 인파들이 동서남북으로 서로를 마구 밀어젖히면서 참사를 더 키웠다는 이야기. 참고로 "밀어!"가 아니라 "뒤로!"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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