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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Jan 07. 2023

대성당들의 시대

복고주의와 우리의 내일

복고주의는 나쁜가? 조금 더 들어가 보자. 과거는 항상 틀렸고 오늘은 항상 옳은가? 아마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지나온, 그리고 지금은 상실된 과거 중에서도 분명 긍정적으로 복기해 볼 만한 어떤 장점들이 있을 수 있다. 분명 오늘이 어제보다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대성당들의 시대가 왔어. 이제 세상은 새로운 천년을 맞지. 하늘 끝에 닿고 싶은 인간은 유리와 돌 위에 그들의 역사를 쓰지."


그럼에도 분명한 건, '어제'의 세상은 '오늘'의 세상에 자리를 내어주고 역사의 저편으로 저물어 스러져갔다는 점이다.   


전근대 기독교/유교 원리주의 사회, 나치독일, 일본제국, 소비에트 연방, etc, 이 모든 '어제'들은 우리의 '오늘(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밀려 시간의 저편으로 스러져갔으며, 어제의 유산을 이어간다고 주장하며 애써 악착같이 버텨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일부 '잔재들'역시도 오래가긴 어려울 걸로 보인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하다. 설령 '어제'가 '오늘'보다 우월했던 어떤 부분들이 있다 한들, 그 장점들은 단점을 상쇄할 만큼이 되진 못했다. 결국 우리의 '어제'들은 장점을 훌쩍 띄어 넘은 단점들을 미처 다 상쇄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무너지고 소멸해 간 것이다. 


소위 말하는 복고주의자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우리가 잊어버린 어제의 일부가 우리의 오늘을 보강하는데 충분히 유효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걸 넘어, 어제의 전부가 오늘보다 더 우월했고 아름다웠노라고 말하길 즐긴다. 실로 대서양 아래로 가라앉은 아틀란티스요 태평양의 뮤대륙, 기억 저편의 노스탤지어인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어제의 전부가 오늘보다 우월했고, '그 어제'는 인류 진보의 정점이며 헤겔식 절대정신의 완성이었다면 그렇게 우월했던 '어제'는 어째서 '오늘'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렇게 스러져갔단 말인가!


그러니 말하건대 '어제'를 칭송하는 이들은 어째서 그 '어제'가 결국 '오늘'로 이어지지 못하고 무너져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는 말이지만, 현대 자유주의의 모순은 그 자유주의보다도 먼저 스러져간 어제의 전부를 그저 기계적으로 복원시키고 이를 황금송아지마냥 무지성 숭배하는 방식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 소실된 어제의 일부가 우리의 내일을 보강하는 데 일부 유효할 수는 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일뿐. 스러져간 어제의 실패상들은 '어제'가 스스로 찾아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개념으로 보강되어야만 하며, 그러한 '새로움'을 거치고 나서야 그 어제는 어제와 전혀 다른 내일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책임지게 되는 것이다.



"대성당들의 시대가 무너지네. 성문 앞을 메운 이교도들의 무리. 그들을 성 안으로 들게 하라. 세상의 끝은 이미 예정되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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